이찬웅,《들뢰즈, 괴물의 사유》(이학사, 2020)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저자의 등에 붙어서는 그로 하여금 아이를 낳게 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의 아이지만 동시에 괴물스러운 어떤 것 말이죠. 아이가 그의 것이라는 것,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저자는 실질적으로 제가 그에게 말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말해야 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괴물 같다는 점 또한 필연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가 즐거워하는 모든 종류의 은밀한 탈중심화, 미끄러짐, 부수기, 방출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14쪽 주석)
들뢰즈에게 철학은 진리의 사유가 아니라 생명/삶Vie이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는 베르그손과 스피노자의 교차점 위에서 생명을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간명하게 정의한다. 들뢰즈에게 생명의 도약은 창조의 최전선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일어난다. 기존에 확립된 법칙 바깥에서 역사적 진행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 독특한 사건으로서 도래한다. 들뢰즈의 사유는 생명의 혼돈chaos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경계면에 집중한다.(257쪽)
아마도 들뢰즈 하면 고개부터 절래절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난해한 철학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을 한 권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난이도 넘치는 그의 문장과 현란한 철학적 개념에 책장을 덮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설령 철학적 개념이 별로 없는 쉬운 문장이라 할지라도 그의 말은 은유와 상징이 넘쳐난다. (첫번째 인용문을 보라! ‘괴물스러운 아이’는 무엇일까?)
이 난해한 들뢰즈를 프랑스 본토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이찬웅의 논문집 모음인 《들뢰즈, 괴물의 사유》(이학사, 2020)을 일주일에 걸쳐서 차분히 읽었다. 이 책은 교양서나 입문서가 아니라 전문연구서(논문모음)이기에 읽기에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사람(!)이 한글(!)로 쓴 것이기에 전문번역서보다는 쉽게 읽힌다. 게다가 이 책은 들뢰즈에 대해서 단편적이고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들을 다양하고 풍부한 관점에서 소개했다는 점, 들뢰즈가 참고하고 지지했거나 비판했던 철학(자)에 대해서도 압축적이고도 친철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 철학 전반에 대해서 지적 지도를 그리고 싶은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자신한다.
나 역시 들뢰즈의 중기(과타리와의 공동작업기, 정치적 격변기)의 저작에 관심이 있었을 뿐 초기(철학적 사유의 형성기)와 후기(소설, 회화와 영화 등 예술적 작품들에 대한 미학정립기)에 대해서는 초보적이거나 무뇌한에 가까웠기에, 이 글을 통해 나 자신이 계발되는 지점이 많았다. 저자는 들뢰즈를 전공하고 돌아와 이러저런 학술지에 들뢰즈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그 10여 년의 연구를 일단락 지으면 이 책을 낸 것이니, 이 책의 품질에 대해서는 보장할만 하다.
편법이기는 하지만 이 책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이 책을 설명하는 출판사 제공 책소개는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에 대한 친절한 소개를 통해 들뢰즈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맛보기만 노출해보자면 ;
존재의 일의성 ― 우리 안에 있는 단 하나의 추상적 괴물
들뢰즈는 자신의 사유를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이것은 서양철학사에서 간신히 전해져온 소수 전통이었다. 들뢰즈가 그린 계보학에 따르면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가 앞서 있고 자신은 그 뒤를 잇고 있다. 들뢰즈는 그 전통을 이어받아 가장 멀리까지 밀고 간다.
모든 존재자는 서로 다르지만 ‘존재한다’라는 술어의 의미는 그들 모두에게 같다. 이것은 이를테면 신(神)과 진드기의 존재 의미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만드는, 존재의 평등성을 긍정하는 가장 간명하고 과격한 정식이다. 들뢰즈에 의해 세워진 이러한 ‘일의적 존재’의 개념은 신성모독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초월적 존재자에 대한 전투로 번져나간다. 이 깃발 아래에서 존재자들은 각자의 존재 안에서, 존재를 통해 ‘신을 통하지 않고’ 서로 직접 공통성과 동등성을 교환하는 존재로 새롭게 규정된다.
(전체 글이 궁금한 분을 위해 링크를 붙인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7997081)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더 해보자면, 나는 장자철학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 장자철학에 어울리는 서양사상가를 찾던 중 들뢰즈가 딱이라는 잠정결론에 도달했다. 들뢰즈는 20세기의 장자다. 기존의 신, 실체, 이데아 중심의 형이상학 체계와는 다른 형이상학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우주적 스케일의 동물행동주의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혼돈을 만물의 생동하는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특히 ‘괴물’들과 괴물적 사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에서 장자와 앙상블을 이룬다. 나중에 장자와 들뢰즈를 같이 다루는 책을 꼭 써보고 싶다.
<추신> 이 책을 읽다가 들뢰즈가 격찬한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혹시 번역되어 있는지 찾아보았다. 있었다. 도서출판b에서 2012년에 진작 번역해놓았다. 당장 주문하였다. 우리나라 출판계도 썩 괜찮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한다. 이 책에 대한 독서노트도 조만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