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커피를 믹스커피로 배웠다. 학교 자판기에 100원을 넣으면 마실 수 있었던 그 달달한 커피는 쉬는 시간의 활력이요, 다음 시간을 위한 에너지 보충 역할을 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처음을 믹스커피로 시작했으니 믹스커피야말로 나에게는 커피맛의 본령(本領)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 여덟에 장가를 가서도 그 달달한 커피맛을 즐겼다. 그러다가 믹스에 들어있는 프림이 몸에 안 좋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커피에서 프림을 뺐다. 건강은 챙기고 싶었나보다. 프림을 빼니 고소한 맛을 덜했지만, 달달한 맛은 한층 살아났다.
어머니의 커피 레시피는 2:2:2였다. 진하고 고소한 커피의 맛이 풍미를 더했다. 지금도 어머니를 만나면 2:2:2로 마신다. 일종의 맹약(盟約) 같은 것이니까. 하지만 일상적으로는 프림을 빼고 마셨다. 그것은 나와 맺은 작은 약속과 같은 것이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니, 내 주위에 그 쓰디쓴 커피만을 먹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도 실험 삼아 몇 모금 마셔보았지만, 달달한 커피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그 강력한 쓴맛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당뇨 증세를 보인다는 건강진단과 함께 삼백(三白, 설탕, 밀가루, 쌀)을 금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워낙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처지라 지금도 즐기지만, 먹을 때마다 조금은 내 몸에 미안해졌다. 쌀밥은 현미밥으로 대체되었다. 꿀떡꿀떡 넘어가는 쌀밥에서 거칠거칠한 현미밥으로 갈아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현미밥도 나름 장점이 있었다. 오랫동안 씹어보며 단맛이 우러나왔다. 지금은 현미밥을 잘도 먹는다.
자, 마지막 남은 관문이 바로 커피에서 설탕을 빼는 것이었다. 용기를 내보았다. 커피를 끊을 수 없으니 설탕이라도 끊어야 했다. 처음에는 연하게 커피를 마셨다. 연한 커피를 천천히 음미해보니 커피에 쓴맛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맛도, 짠맛도, 신맛도, 구수한 맛도 있었다. 물론 이런 맛들을 제대로 느끼기에는 내 혀가 단맛에 오래토록 길들여있었지만, 설탕을 뺀 커피를 지속적으로 마시니 혀가 살아났다. 이제는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경지가 되었으니 나름 맛을 느낀다고 말해도 되려나.
말이 길어졌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커피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잘 로스팅된 커피는 그야말로 풍미 작렬인 것처럼, 좋은 책 역시 풍미작렬(風味炸裂)이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풍미가 넘쳐나는 책이 바로 《장자》다. 내편, 외편, 잡편을 합쳐 33편이나 되는 이 두툼한 서물은 그야말로 ‘물건’이다. 각 편마다 읽을 거리가 풍성하여 어느 편을 읽어도 실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량이 만만치 않아 한 권에 모두 소개하기에는 벅차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장자》 속에서 가장 풍미가 높은 이야기를 선별하여, 그 맛의 종류대로 소개해 보는 것이다.
커피의 종류에 따라 강한 맛이 다르겠지만, 커피에는 여섯 가지 맛이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신맛, 단맛, 쓴맛, 짠맛, 구수한 맛에 감칠 맛까지. 그래서 나도 《장자》에서 선별한 이야기를 이 여섯 맛에 배당해 보았다. 신맛 편에서는 장자의 신산(辛酸)한 삶을, 단맛 편에서는 장자의 달달한 유머를, 구수한 맛 편에서는 힘든 삶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장자의 인생관을, 쓴맛 편에서는 장자의 촌철살인 정치풍자를, 감칠 맛 편에서는 장자에 카메오처럼 등장하는 동식물 들을, 마지막으로 짠맛 편에서는 장자의 처세술을 싣기로 했다.
그리하여 연재 제목은 《장자의 맛》이다.
제일 앞에 바리스타 장자에 대해 소개한다. 《장자》의 맨 마지막 장인 <천하>에는 장자 학파에 영향을 끼쳤던 다양한 사상가들에 대한 소개와 평가가 있다. 재미난 것은 그 소개와 평가에 장자 자신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평가하는 재미난 책, 《장자》.
글의 서술 방법은 장자에서 뽑은 인용구를 소개한 후, 해설을 덧붙이는 형식이다. 이 해설은 전문적 지식을 소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장자를 읽는 나의 삶과 생각을 녹여내는 것이다. 장자에 더해진 나의 맛은 과연 어떠한 맛일까? 쓰고 있는 나조차 궁금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여행을 다녀온 후의 모습이 달라지듯,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또한 많이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장자와 나의 동행기라고 보아도 좋겠다. 나는 일단 장자라는 가이드를 믿고, 장자의 세계로 떠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동반티켓을 보낸다.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장자와 함께 떠나는 커피맛 여행! 자 그러면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