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맛 5 - 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에나!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도라는 것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장자가 말했습니다.
“어디에든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적해 주십시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습니다.”
“어찌 그처럼 하찮은 곳에 있습니까?”
“강아지풀이나 잡초에도 있습니다.”
“어찌 더욱 하찮은 것에 있습니까?”
“기와나 벽돌에도 있습니다.”
“어찌 더욱 심해집니까?”
“똥이나 오줌에도 있습니다.”
동곽자가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선생의 질문 자체가 부족했습니다. 돼지가 얼마나 살이 쪘는지 확인하는 방법으로 돼지를 밟아보는 것이 있는데, 살이 덜 찌는 부위를 밟을수록 더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딘가에서만 길을 찾으려는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 만물은 그 어느 것도 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극한 도도, 위대한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가 언제나, 어디에나, 무엇에나 있다는 말은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습니다.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 <지북유> 11
동양철학에서 ‘도(道)’만큼 널리 두루 쓰이는 말은 없다. 어떠한 유파의 철학이라도 결국은 도(道)를 찾으려는 것이다. 이 도를 진리(the Truth)라 풀기도 하고, 길(the Way)이라 풀기도 하며, 방법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진리에 도달하는 길, 진리를 알아채는 방법, 그것이 도(道)다.
그러니 학문하는 자는 응당 진리가 어디에 있냐고 질문해야 한다. 궁극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자는 이 질문 자체가 부족한 것이라고 한다. 진리를 무엇에 한정하여 찾는다는 것은 진리를 특권화하는 것이다. 특정한 것에만 진리가 있다면, 어떤 것에는 진리가 없다는 말이 된다. 장자는 말한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無所不在)” 이것이 대전제다. 하늘 아래 있는 것들은 그 어느 것도 빠짐없이 언제, 어디서나 하늘 아래 있다. 위대한 진리, 위대한 언어는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 모두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손가락이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어느 한 손가락만 특별히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편협되고 어리석은 일인가. (至道若是, 大言亦然. 周遍咸三者, 異名同實, 其指一也.)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 왜 그런가? 모두가 한 몸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물은 모두가 하나의 도에 연결되어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과 절망 속에서 우리는 신(神)이 어디에 있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장자의 대전제에 따르면 이는 부족한 질문이다. 신이 없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은 어떠한가? 물어 뭐하는가? 우리와 함께 고통과 절망을 견뎌내고 있다. 우리의 탄식의 신의 탄식이고, 우리의 기도가 신의 기도이다. 그러니 어떠한 길을 걷든지, 꽃길이든지, 자갈길이든지 그 속에서 그대의 신을 발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