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맛 21 : 물고기의 즐거움

단맛 11 - 어디서 알았소?

by 김경윤

어디서 알았소?

장자가 혜자와 호수의 돌다리를 거닐고 있을 때였습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물고기가 한가롭게 놀고 있군요.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죠.”

혜자가 대꾸했습니다.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디서[安]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이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내가 아닌데 어디서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걸 아셨소?”

혜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대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대도 물고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게 틀림없지요.”

장자가 말했습니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대는 나에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디서 아느냐고 물었지요. 그 말은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었음을 이미 알았기에 물은 것입니다.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여기 호수의 돌다리에서 알았습니다.”

- <추수> 15

https://nlboy.tistory.com/510에서 카피해왔다. 참 예쁜 물고기들이다. 이 친구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장자의 혜자의 대화가 귀엽다. 서로 한치도 양보를 하지 않는다. 표정은? 아마 실실 웃고 있을 것이다. 죽기살기로 나누는 대화가 아니다. 웃자고 나누는 대화이다.

대화의 형식논리학으로 치자면 혜자의 승리이다. 혜자는 장자가 아니고, 장자는 물고기가 아니니(장자≠혜자≠물고기) 서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모른다(∴장자는 물고기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 혜자의 논리다. 그런데 장자는 논리학이 아니라 언어학이다. 혜자의 질문은 이렇다. “너는 어디서(혹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는가?” 원문은 이렇다. “安知魚之樂?” 여기서 포인트는 한자 ‘안安’이다. 이 한자는 ‘어디서(where)’로도 풀 수 있고, ‘어떻게(how)’로도 풀 수 있다. 장자가 혜자의 말꼬투리를 잡았다. 논리로 안 되니 말장난을 한 것이다. “어디서 알았냐?”는 물음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전제로 하니, ‘어디서’만 해명하면 된다.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호수의 돌다리에서 알았다”라고.


논리학자인 혜자의 치밀성을 말장난으로 눙치는 장자의 말솜씨! 그냥 웃으면 된다. 그런데도 말장난을 더 해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한다. 한 번 가보자. 혜시는 존재론과 인식론을 일치시킨다. 존재가 다르면 서로 알 수 없다. 소통불가능성에 한 표를 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존재 자체의 인식불가능성이 나온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대중가요 ‘타타타’는 그렇게 탄생한다. 자신도 알 수 없으니, 남은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대화는 무슨 소용이며, 이해는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장자의 존재론은 변신의 존재론이다. 장자는 나비가 되기도 하고, 나비가 장자가 되기도 한다. 존재의 경계선은 무수히 변경되고 희미해진다. 이러한 존재론이라면 물고기의 마음도 알 듯하다. 경계 없는 마음, 존재의 일체감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소통의 전문가 장자는 물고기의 마음을 안 것일까?


분할과 단절의 전문가 혜자와 소통과 연결의 전문가 장자는 이처럼 겉보기에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상상력을 더 발휘하여 신분 사회에서 귀족의 수혜자 혜자와 민중의 대변자 장자라는 계급적 시선의 대립으로 읽을 수도 있다. 코로나 시대로 강화된 비대면(uncontact) 사회에 슈퍼 울트라 강력 비대면을 원하는 부유층은 아예 다른 계급들과 구별되는 고급 로열 공간을 확보하기를 바란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이들에겐 자신의 품격 있는 생존만이 중요할 뿐 민중의 생존 따위는 눈 밖의 사태이다. 비대면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두운 풍경이다.


<사족> 장난기를 발휘하다 보니 너무 오버한 듯하다.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니 너무 심각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여기까지가 <단맛-장자의 유머> 편이다. 다음은 <구수한 맛 – 장자의 인생관> 편으로 이어진다. 구독과 좋아요. 독자들의 매너라고 말하면 오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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