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쓰기 63 : 별일 없이 사는 즐거움

2020.10.15. <고양신문> 인터넷판

by 김경윤

같이 동네에서 지내는 젊은이들과 함께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한 달에 한 번 <지적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2, 30대 청년들입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거리는 한가했고, 분위기는 조용했습니다. 제주도의 날씨가 원래 그렇지만 하루는 꼬박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은 돌아다니지 않고, 시장에서 음식물을 사다가 거실에 차려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돌아가며 노래도 부르다가, 만두도 끓여 먹고, 라면도 끓여 먹었습니다.


따로 프로그램을 정해놓지 않았습니다. 그저 넉넉히 시간을 마련하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마당에 나가 담장 너머로 심어져 있는 귤나무를 보았습니다. 날씨 때문인지 귤은 아직 파랬습니다. 밤에는 바닷가가 보이는 방파제를 거닐었습니다. 밤하늘에 별들도 보았습니다. 방파제에서 노래도 불렀습니다. 들어와서 자고 싶은 사람은 자고,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사람들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돌아가면 다시금 일상의 바쁜 나날을 보내며, 각자 살기 위해 분투해야 하지만, 같이 지내는 시간만큼은 어떠한 의무도, 꼭 해야 할 일도 없이 지냈습니다. 아침에는 늦게 일어났습니다. 관광용 식당이 아니고 원주민들이 애용하는 허름한 식당에 들러 끼니를 채웠습니다.


일에서 벗어난 공백과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었습니다. 같이 한 공간에만 있다는 걸 제외하면 그야말로 할 일 없는 백수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장기하의 노래말처럼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깜짝 놀랄 만한 일인지요. 함께 시간을 내어 한 장소에 모여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랄 만한 축복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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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길가메시 이야기’가 과연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삶이 단순할수록 행복도 단순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요즘에는 고차방정식이 아니라 인생의 사칙연산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으로 이루어진 인생의 원리가 있지 않을까 따져봅니다.


기쁨은 더하고, 슬픔은 빼고, 우정을 곱하고, 지혜를 나누면 한 생애 넉넉히 살 만합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생각이 더욱 단순해집니다. 이 네 가지만 지키고 살아가자 다짐해봅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도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은 ‘지혜와 우정’이라 말했으니, 함께 공부하고, 함께 친하게 지내자고 서로 눈빛을 교환합니다.


젊은이들과 생을 함께 누린다는 것은 늙어가는 사람에게 더없는 축복입니다. 나는 내 깜냥대로 젊은이들을 환대하고, 젊은이들은 또한 그들의 깜냥대로 서로에게 친절합니다. 이 모임에는 경쟁이 없습니다. 하는 일도 제각기 다르지만, 필요하면 서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도울 수 있는 만큼 성의를 다해 상부상조합니다. 자신의 소중한 일부분을 떼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줍니다.


자의든 타의든 코로나로 제일 많이 남는 것이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궁핍한 나날에 마음도 궁핍해지면 안 되기에 독서와 명상, 글쓰기로 내 자신을 채웁니다. 그리고 가끔은 주변을 돌아보며 챙겨줄 사람들을 떠올려봅니다. 소박한 밥 한 끼, 간단한 안부 인사, 조촐한 술자리, 그도 아니라면 그냥 얼굴 보고 같이 산책을 하거나 잡담을 나누는 것도 풍성한 나날을 채우는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얼굴에 미소가 머물다 갑니다. 잠시 밖에 나가 하늘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습니다. 구름이 청명합니다. 벌써 가을입니다. 별일 없이 행복하게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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