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묻고 내가 답하는 인문학 Q&A
찔립니다. 대답할 처지가 못 됩니다. 그런데 공곰 생각해보면 삼 일도 못 가는 마음도 있고, 몇 년이고 지속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이 마음은 뭐고, 저 마음은 뭘까요? 그 얘기를 조금 해 볼까요?
우리는 뭔가 결정할 때, 또는 마음을 먹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요? 흔히 마음이라고 하지만 이 마음이란 놈이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하나가 아닙니다. 왜 그런 노래 있잖아요.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 그리고 우리는 또 마음과 몸을 별개로 생각합니다. 마치 마음이 몸과 상관없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과 몸을 별개로 생각하는 이분법적 발상은 항상 우리는 배신합니다. 니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마음은 몸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의 소리를 듣지 말고 몸의 소리를 들어라. 대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거창한가요? 그냥 마음 따로 몸 따로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마음보다 몸을 다스리는 것이 훨씬 어렵더라구요.
몸의 지속성에 비하면 마음은 얼마나 변덕이 심한지.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작심(作心)이 아니라 작신(作身)이 중요하다고. 마음 먹지 말고 몸 먹어야 합니다. 이 완고한 몸을 훈련시키지 않는 한, 마음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같습니다. 마음은 금세 바뀌지만 몸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몸의 무거움은 마음의 가벼움을 항상 이깁니다. 그러니 몸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작신(作身)이란 뭘까요? 몸의 환경을 바꾸고, 몸의 관성을 조금 비트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갑자기 몸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이어트 하겠다면 조금씩 몸을 바꾸어야지 무리하게 밥량을 줄이거나 약품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해봐서 압니다. 거의 실패합니다. 금주나 절주를 선언하고서 술집 근처를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술친구에게 전화하면 안 됩니다. 운동을 하겠다면서 책상에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일단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글을 쓰겠다면서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에 넋을 잃고 있으면 안 됩니다. 텔레비전을 끄고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노트를 펼치고 펜을 잡아야 합니다. 칼을 쥐었으면 무라도 썰 듯이, 펜을 잡았으면 뭐라도 써야 합니다. 그게 작신술(作身術)입니다.
정말 뭔가를 하고 싶다면, 몸을 서서히 그 방향으로 바꾸셔야 합니다. 한 술 밥에 배부르지 않는 것처럼, 한 번의 훈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소하지만 반복적인 몸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하늘과 같은 결심을 한다고 해도 헛수고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기타를 잘 치고 싶다면, 일단 기타를 치는 시간을 마련하여 자신의 몸을 기타와 함께 해야 합니다. 작신의 방법론은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Slow & Steady)!’ 밖에는 없습니다. 몸만들기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진도를 빨리 뺄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천천히 몸의 움직임을 느껴야 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늦어도 됩니다. 그러나 멈추면 안 됩니다.
양질전환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렇게 양을 조금씩 늘려가면 언젠가 질적으로 바뀐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먹지 말고 몸을 먹으세요. 마음을 다잡지 말고, 몸을 다잡으세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몸의 방향을 일치시키세요. 그리고 몸이 천천히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천천히 조금씩 지속적으로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버릇의 문제입니다. 반복적인 행동은 버릇을 만듭니다. 버릇이 만들어지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습관은 운명을 바꾼다고 말하던데, 정말로 그런지 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