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은 상찬에 얼굴이 벌개지고, 악평에 가슴이 철커덩 무너져 내립니다. 이는 오랜 시간 작가 생활을 해온 작가라고 해서 무뎌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악평의 경우에는 아무리 초연한 척하려고 해도 쉽사리 가슴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서로가 안면이 있는 직접적 관계라면, 대놓고 싸워볼 용기라도 낼 텐데, 대부분 악평(악플)을 쓰는 사람들은 익명 속에 숨어있는 채로 상처를 주기로 마음 먹은 것이지요. 이럴 경우에는 대락난감을 넘어서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이청춘의 <소문의 벽>이라는 소설에 등장인물인 박준은 자신의 정체는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는데, 독자는 그 빛 뒤에 숨어서 안보이기에 공포스럽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한국전쟁 때 한밤중에 방으로 쳐들어온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인이 전짓불(후레쉬)을 얼굴에 비추며 “너는 남쪽편이냐 북쪽편이냐?”를 물을 때에 공포와 유사한 것이어서 ‘전짓불의 공포’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편가르기를 통해 어느 한쪽에 분명히 설 것을 강요하는 사회, 이분법적 사유만에 익숙한 생활방식애 더욱 도드라집니다. 작가가 이러한 현실에 깊이 감염될수록 글쓰기는 어려워집니다. 특히 저자가 소수자의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사회적 통념을 비판하는 관점으로 글을 쓸 경우, 상찬보다는 악평을 받을 확률이 높아지지요.
이를 대처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당신이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의 저자가 ‘나를 망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 악평 악플에 대처하는 법’에 소개한 매니저론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그곳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나를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들이 나를 망칠 수 없다는 것도”라는 박민정의 글을 인용한 후에, 자신이 얼마나 소심한지 밝히면서 악플에 시달렸던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하는데요. 글의 말미에 이렇게 힘든 자기를 위로하는 가상의 매니저를 설정하여 이런 말을 하게 합니다. “자 모든 건 먼지가 됩니다. 잔뜩 굳은 어깨에 힘을 푸세요. 지금 우리가 쓰는 글은 언젠가 먼지가 되고 세상에는 수많은 먼지 같은 말들이 떠다니다가 가라앉을 거예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해요. 나를 망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 자신이에요. 다른 말로, 나를 망칠 권리는 오직 나에게만 있지요. 굳이 지금 그 권리를 써야겠습니까?”
나에게 이런 자상한 가상의 매니저는 없지만, 그보다 위대한 지혜의 교사 노자가 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충고할 듯 하다. “사람들은 칭찬을 좋아하고, 악평은 싫어하지만 사실 둘다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네.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정상이 아니라면 놀란 듯이 대하게. 칭찬에도 놀라고, 악평에도 놀라게.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말게. 들뜬 기쁨이나 가라앉은 슬픔 따위에 휘말리지 말게. 그저 모든 것이 왔다가 가버리는 것인양 담담하게 흘려버리고, 일상을 되찾게. 몸이나 돌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