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7. 동녘교회 평신도 설교문 초록
내가 다니는 동녘교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평신도가 설교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무런 검열 없이 치러지는 이 자리는 부드러운 이야기부터 가장 급진적인 이야기까지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때의 설교는 진리의 선포가 아니라 진리를 회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 설교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번에 내가 한 평신도 설교가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진리는 소란 속에서 피어나니까.
<성서본문 ; 마가복음 12:28~31>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지만, 독일에 남아 나치에 저항하고,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계획에 가담하다가 발칵되어 43년도에 체포되어 45년에 처형되었다. 그는 값싼 구원을 거부하고 고난과 함께 하는 신학을 구상하였다.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말 중 우리에게 전해진 유명한 문장은 ‘신 없이 신 앞에서’다.
동녘교회 설립자인 홍정수 목사님의 신학생 교육 프록그램 중 ‘기독교적인 용어를 버리고 세속인의 언어로 기독교를 설명해보라’는 과제가 있다. 이 과제는 ‘신 없이 신 앞에서’의 변용이다. 이 변용을 좀더 진행해보자. ‘구원 없이 구원 앞에서’라고도 말할 수 있고, ‘교회 없이 교회 앞에서’리고 말 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진행해보자. 오늘날 기독인이란 크리스천의 번역어이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구원자)를 따르는 자들이란 뜻이다. 기독교인에게 구원자는 예수를 뜻한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 앞에서“, 또는 ”예수 없이 예수 앞에서“ 살 수 있을까?
일찍이 ‘신 없이 신 앞에서’를 근본과제로 삼은 것은 바로 불교였다. 불교의 탄생 이전에는 브라만교가 인도 전역에 퍼져있었다. 브라만교는 철저한 신분사회와 기복신앙에 기초한 종교였다. 지배계급의 구원과 속제에만 신경 쓸 뿐 민중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회의 변화와 그에 따른 민중의 고통에 수 없이 많은 신흥종교운동이 벌어졌고, 그 중에 하나가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불교가 있었다.
브라만교는 신인 브라흐만과 진정한 자아를 뜻하는 아트만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였다. 진정한 자아, 참 자아를 뜻하는 아트만은 신적인 브라흐만처럼 인간에게 변함없는 정신적 자아를 탐구하는 종교였다. 불교는 이 근본존재인 아트만이 허구임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일시적이고 관계적인 인연의 변화일 뿐임을 ‘아나트만’이라고 말했다. 문장으로 바꾸면 영원한 나란 없다는 것이다. 이 나에는 인간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신적존재도 포함된다. 단어로는 ‘무아(無我)’라고 표현할 수 있다. 불교는 변함없는 영원성이라는 기존종교의 대전제를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을 불교용어로 말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그러한 불교에서 부처 역시 구원자가 아니라, 먼저 깨달은 자일 뿐이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깨달음 여부에 있으니, 최종적인 깨달음은 속세간의 욕망의 불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열반(涅槃)’이라 한다. 열반은 본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궁국적 깨달음을 뜻하는 것이다. 불교는 신도 구원자도 없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윤리를 세웠다.
물론 이러한 불교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온갖 신상을 만들고, 기복불교, 제도불교로 타락했지만, 본래 정신은 그러하지 않았다.
부처가 타락한 것인가 불교가 타락한 것인가? 다시 우리의 자리로 돌아와 예수가 타락한 것인가? 교회와 제도가 타락한 것인가? 21세기 기독교의 타락은 너무도 자명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대로는 안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무기력했던 기독교를 변혁하고자 하는 본회퍼의 노력은, 코로나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는 교회의 타락에 영감이 될 수 있다. 세속과 교회를 분리하고, 죄인과 의인을 양분하고, 천국과 지옥을 상품화하는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적 욕망을 양산하고 성공을 찬양하고 부유함을 추구하는 기독교를 멈춰야 한다.
이는 몇 개의 부속을 바꾸거나 낡은 것을 수선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낡은 교리와 제도를 근본적으로 검토해야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 없이 크리스찬을 생각한다. 그리스도라는 용어의 자장 안에는 원죄론, 구세주론, 대속론이 있다. 21세기는 민주주의의 시대이다. 세계인은 아무도 구세주를 기다리지 않는다. 구세주론에 빠져 있는 한 기독교는 새로운 출구를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불교에게 ‘자리이타’의 사상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사랑’의 사상이 있다. 기독교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최대, 최고치의 사랑담론이다. 이 사랑담론은 차별을 반대하고 평등을 전재하며, 모든 존재를 환대하는 타자의 윤리를 구성한다.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소외된 자를 자신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인권의 최전선에 설 수 있는 힘을 준다. 예수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최대, 최고의 계명이 바로 ‘이웃사랑’이다.
우리는 신 없이 신 앞에서,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가 가르쳐준 사랑을 새롭게 구성하자. 21세기 기독교를 혐오와 차별 없는 사랑의 종교로 구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