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관점에서 새로 쓰는 노자 <도뎍경>
만약에 코미디언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이면서 이 장면이 왜 웃긴지를 설명하면 그야말로 썰렁해질 것이다. 친절이 지나치면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아니라 사족(蛇足)이 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면, 독자의 몫도 남겨두어야 한다. 지나치게 친절한 묘사나 설명은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게 된다. 장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메시지가 전달되었다면 굳이 메시지를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독자를 신뢰하지 않는 작가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자긍심의 차원을 넘어 자뻑의 경지까지 작가가 도달한다면 독자에게 신뢰를 잃게 된다. 글쓰기는 작가가 홀로 고독의 시간을 견디며 쓰는 것이긴 하지만, 그 자리에 독자가 함께 글을 읽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그 가상의 독자와 수다를 떠는 것도 재미있지만, 적절하게 이야기하다가 멈출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공백이 있는 글쓰기,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쓰기를 작가는 연습해야 한다.
말을 낭비하지 말자. 말을 아끼자. 작가의 입이 아니라 독자의 입을 통하여 말하게 하자. 얼마 전 종결된 미국드라마 <바이킹스>의 시즌6 마지막 회를 시청했다. 표류 끝에 아메리카(?)에 도착한 라그라르의 아들 우베가 그곳에 미리 정착한 바이킹 장인(匠人) 플로키와 나누는 이야기가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우베의 아버지이자 바이킹의 전설적인 왕인 라그나르와 온갖 역정을 겪은 장인 플로키는 우베와 함께 바닷가에 인디언 담요를 두르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플로키가 우베에게 “나는 곧 죽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자, 우베는 “그게 끝인가요?”라고 묻는다. 플로키는 뭐라고 답했을까?
침묵이었다. 카메라는 침묵 속에서 바닷가의 지는 해를 보여주고, 다시 앵글을 바꿔 그 지는 해를 바라보는 우베와 플로키를 투 샷으로 잡는 것으로 끝났다. 그 엄청났던 바이킹의 역사를 정리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런데 침묵이라니. 그런데 그것으로 족했다. 아무 말 없는 침묵 속의 여운이 수많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작품 속에 모든 것을 담을 필요는 없다. 독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작품은 오래 가지 못한다. 여운이 남는 글은 독자를 제3의 창작자로 만든다. 독자도 창조한다. 읽기를 통해, 상상력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