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자의 작가론 21 : 경계에 서서

작가의 눈으로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

by 김경윤
원고지 노자명상 1021.jpg

세상 속에 작가의 위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돌리는 사람일까요? 중심 가까이에 있으면서 중심을 강화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경계에 있으면 안팎을 두루 볼 줄 아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세상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관조의 눈을 가진 사람일까요? 여러분은 작가의 위치를 어디에 놓습니까?


철학적 용어로 동일자와 타자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결속력 있는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싶은 사람은 동일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요. 적과 나를 가르고, 내 편과 니 편을 가르고,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기준이 분명한 사람은 동일자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때 내 편(우리)에게는 지극히 관용적이면서 니 편(너희)에게는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기 쉽지요. 자기 편이 아닌 사람을 끊임없이 자기 세상 밖으로 밀어내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습니다. 이런 세계에 속한 작가들은 많은 사람의 지지와 동의를 얻고, 인기와 명예를 차지하기도 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고, 원하는 이야기를 발굴하기 때문입니다. 내부 시선을 강화하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이와는 달리 동일자의 세계에서 밀려나 소수가 되어버린 타자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작가들도 있지요. 역사 속에서 형성된 타자들을 열거해보면, 서구적 관점에서 밀려난 동양, 제국의 관점에서 밀려난 식민지들, 백인의 관점에서 벗어난 유색인, 남성의 관점에서 벗어난 여성, 정상인(?)의 관점에서 벗어난 비정상인, 이성애의 관점에서 벗어난 다양한 성애들,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난 동물들은 타자 취급을 받았지요. 주류 역사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이들의 관점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작가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당대의 비난을 받으며 힘겹게 작가생활을 해야만 했지요. ‘외부(타자)의 시선’을 도입하려 애쓰는 작가들입니다.


한편 이도저도 아닌 경계선에 머물면서 안팎을 두루 살피는 ‘경계의 작가’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적과 아, 내편과 니편,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선에서 양쪽을 모두 바라보는 이중의 눈을 갖습니다. 편가르기가 아니라 편지우기를 해나가기에 회색지대에 속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는 이러한 유형의 작가들은 양쪽 진영에서 모두 칭찬을 받지 못하고 욕을 먹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양쪽을 긍정하는 양시론(兩是論), 양쪽을 비판하는 양비론(兩非論)은 비겁하다고 평가받기도 하지요. 자칫 잘못하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 속하지 못했기에 비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오해받기도 합니다.


나는 아마도 이 회색지대에 속한 작가인 것 같습니다.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경계에서 새로운 생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명하게 이름 붙여진 것들과 이름 없는 것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이름을 만들어가는 작가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이름에 포섭되지 않는 작은 이름을 만들어내기, 거대한 소리에 가리워진 작은 소리에 귀기울이기,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서 포착되지 않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 모색하기. 구분과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화해와 공생의 원리에 따라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자리를 마련하기.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그래서 계몽도 무지도 아닌, 아직은 뭐라 명명할 수 없은 애매모호한 지점에서 어둠에 친숙해지면서 밝음을 모색하는 낯선 길을 찾아보고 싶은, 그런 작가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21 독서노트 8 : 두 마리 늑대의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