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진상을 모르는 것이 냉소주의자들이다. 사실 우리는 행성 A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정말로 되고 싶어하는 그것 말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이 되어라. 용기를 내라. 스스로의 본성에 충실하고 타인에게 당신의 신뢰를 보여주어라. 대낮에 선을 행하고 자신의 관대함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처음에는 속기 쉽고 순진하다고 묵살당할 수 잇다. 그러나 오늘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 내일의 상식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 이제 새로운 현실주의를 위한 시간이 왔다. 인류를 새로운 시선을 바라볼 때이다.”(528)
셀럽 과학자 최재천과 정재승이 앞다투어 추천사를 써준 책이 나왔다. 게다가 슈퍼베스트셀러 저자인 유발 하라리도 추천사를 써주었다고 하니 일단 껍데기부터 부럽다. 그런데 저자 이름이 낯설다. 뤼트허르 브레흐만. 자료를 뒤져보니 나만 몰랐지 유명한 저널리스트였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저널리스트이자 사상가. 유럽 전역을 뒤흔든 혁신적인 대안 언론 《드 코레스폰던트(De Correspondent)》의 창립 멤버이자 전속 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유럽 언론인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르는 등 뛰어난 저널리스트로 평가받는다. 위트레흐트대학교,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으며, 박사 학위 대신 저널리스트의 길을 택했다. 의혹이나 속보로 점철된 기존의 뉴스 사이클을 넘어, ‘보편적 기본소득의 정책사’ 등과 같이 실증적 사료 연구를 바탕으로 한 심층보도에 주력한다. 그의 기사는 《드 코레스폰던트》를 비롯하여 《가디언》, 《워싱턴포스트》, BBC 등에 게재된다.” 뒤늦게 기억해둔다.
이번에 나온 책 이름이 《휴먼카인드》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를 연상시킨다. 인류를 뜻하지만 남성주의적인 ‘맨카인드(mankind)’가 아니라 중립적인 용어 선택이 돋보인다. 게다가 “인류는 친절하다(Human is kind)”를 연상시키는 조어법이 센스있다. 저자는 인류를 ‘호모 퍼피(Homo Puppy)’라고도 부른다. 타인과 협력하고 공감하도록 진화해온(길들여진) 종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용어 자체가 빙긋 웃게 만든다.
우리는 인류를 난폭하고나 무지하고 잔인하며 언제든지 악에 물들 수 있는 연약한 존재로 상상하곤 한다. 얄팍한 선함의 껍데기 속에 악마가 살고 있는 이미지는 대중매체와 역사, 과학실험 등을 통해 강화되어 왔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라는 소설에서는 무인도에 착륙한 소년들이 점점 악인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이 소설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펜퍼드 교도소의 실험,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 등의 과학적 실험은 인간이 언제든 악해질 수 있다는 공포스런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스터섬의 몰락이나 캐서린 제노비스의 방관적 죽음의 역사나 사건 등은 인간의 악함을 증명하는 단서가 되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실험과 역사, 사건들을 실제로 객관적인 사실로 확인해 보니, 대부분 소설적 공상이거나 과장이거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가히 충격적인 반전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빅히스토리를 읽을 때의 충격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충격이라 말할 수 있다. 하라리의 책이 역사적 시간 순으로 구성되었다면, 이 책은 마치 추리소설처럼 우리가 믿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반증과 반론을 제기하면서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이렇게 치밀할 정도로 조사해서 뒤집는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는 인간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해왔던 이유는 인간 안에 선한 본성이 있고, 협력을 통하여 선한 본성을 잘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감춰진 인간 본성을 믿고 우리의 미래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 때에만 현재 당면한 양극화의 문제, 혐오와 불평등, 편견과 대결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 위해서다. 물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믿음의 기초한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행동이 수반될 때 인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 속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한다. “나의 내면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두 마리 늑대의 처절한 싸움이다. 하나는 악이다. 분노에 차 있고 탐욕스러우며 질투가 심하고 교만하며 비겁하다. 다른 하나는 선이다. 평화롭고 타인을 사랑하며 겸손하고 관대하며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다. 너의 내면에서도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잠시 뒤 손자가 “어느 쪽 늑대가 이기나요?”라고 묻자 노인은 밋소 지으며 답한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지.”(41~42쪽)
우리는 어느 쪽에 먹이를 주고 있나?
추신>
책을 읽으며 저자애 대한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젊고 의욕적이며 선의가 넘치는 그의 발언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이 책 이전에 나온 저자의 책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김영사, 2017)를 구입하였다. 때마침 선거철이다. 코로나 와중에 치러지는 선거의 쟁점 중 하나가 기본소득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역사 속에 이미 실현되었던 기본소득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어, 선거기간에 필독서로 찜해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