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훌륭한 스승
가장 훌륭한 스승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자
그다음은 잘 가르치는 자
그다음은 억지로 가르치는 자
그다음은 가르칠 수 없는 자
학생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학생도 선생을 믿지 않습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은
학생들이 알아서 배우게 합니다.
학생들이 알아서 배우니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모든 배움은 학생들에게서 나옵니다.
스승과 제자, 교사와 학생, 가르침과 배움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를 좋아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칼로 무를 자르듯이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업 현장은 그렇게 선명한 이분법으로 나눠지지 않습니다. 열이 나게 가르쳐도 배운 게 없다고 하는가 하면, 가르친 것이 없는데도 뭔가 배웠다고도 합니다. 참으로 난처합니다.
그래서인지 우치다 타츠루는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라는 책에서 수업을 이렇게 새롭게 정의합니다. “무엇을 배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가르쳐 줄지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 상황이 이 정도면 차라리 수업은 배우는 자의 ‘주체적 역량’을 확인하고, ‘배움의 갈망’의 북돋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가르침 없이도 배움은 있을 수 있지만, 배움이 없으면 가르침은 무효이기 때문입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심지어 『스승은 있다』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배움에는 송신하는 자와 수신하는 자, 두 명의 참가자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수신자’입니다. 제자가 선생님이 발신하는 메시지를 ‘가르침’이라 믿고 수신할 때 비로소 배움은 성립합니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배움’으로서 수신된다고 하면 그 메시지가 ‘하품’이든 ‘딸꾹질’이든 ‘거짓말’이든 상관없습니다.”
학생들을 믿어야겠습니다. 그 믿음만 있다면, 교사가 하품을 하더라도 배울 테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