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구마을자치센터 <마을자치저널> 원고
혐오는 우연히 슬픔의 원인이 되는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혐오’라는 주제를 받고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만지작거린다. 혐오는 일종의 감정이고, 이러한 감정들을 스피노자처럼 정밀하게 분석한 철학자는 유사 이래 없기 때문이다. 통상 스피노자는 경험보다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 철학자로 분류되지만, 스피노자는 경험에서 생기는 감정들에 깊은 관심을 두고 관찰한 철학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을 잘 이해하고 이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하여 상세히 다루었다. 그 이야기를 배경삼아 이야기해보자.
인간의 대표적 감정인 기쁨과 슬픔
고대철학자로부터 현대철학자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관심사는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이다. 앞의 주제가 인식론의 문제라면 뒤의 주제는 윤리학에 문제이다. 감정은 두 주제에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감정에 휘둘릴 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고, 불안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의 세기가 크면 클수록 삶의 지반은 더욱더 흔들린다. 물론 역으로 삶의 지반이 흔들릴 때 감정의 세기가 커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애인과 헤어지거나, 직장을 잃었을 때, 소중한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겉잡을 수 없는 없는 슬픈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슬픔이란 수동적 감정이므로 생각의 지경과 삶의 영역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마치 상처입은 짐승이 피난처를 찾아 숨어들 듯. 슬픔은 우리를 더욱 작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위축시킨다. 반면 애인이 생기거나 지원한 직장에 합격을 하게 되면 우리에게 기쁨은 넘쳐난다. 기쁨은 우리를 더욱 크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렇듯 기쁨과 슬픔은 인간이 느끼는 대표적인 감정이고, 이 두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느냐가 삶에서 중요해진다.
행복의 공식 : 기쁨의 증가, 슬픔의 감소
이를 바탕으로 단순하게 행복의 공식을 만들어보면 이렇다. 행복은 기쁨의 증가에 비례하고, 슬픔의 증가에 반비례한다. 따라서 행복하려면 기쁜 것들을 가까이하고, 슬픈 것들을 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들을 이 기쁨과 슬픔의 감정에 배속시켜 설명하였다. 기쁨의 보따리에 들어있는 감정은 사랑, 좋아함, 조롱, 희망, 신뢰, 환희, 호의, 존경, 동정, 자기만족, 명예, 감사, 자비심, 공손함 등이 들어있다. 반면 슬픔의 보따리에는 미움, 혐오, 공포, 절망, 연민, 분노, 멸시, 질투, 겸손, 후회, 소심함, 치욕, 분노, 복수심, 잔인함, 두려움, 불안함, 당황 등이 들어있다.
‘남혐’(또는 ‘여혐’)이라 표현되는 사회적 정서가 슬픔의 감정에 담겨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 혐오의 유행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행복을 멀게 만드는 감정인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혐오하면 할수록 우리는 불안해지고 불행해진다. 따라서 혐오의 감정은 그 원인과 현상을 잘 이해하고 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혐오는 일종의 슬픔이며, 우리는 슬픔으로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혐오를 구성하는 요소들 : 무지, 무책임, 비겁, 나약함, 오만함
사실 혐오의 표출은 복합적인 현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단일원소가 아니라 화합물에 가깝다. 마치 물이 수소 2개에 산소 1개의 결합이듯이. 혐오라는 감정이 표출되려면 우선 선입견(先入見)이나 무지(無知)가 있어야 한다. 혐오는 객관적인 이해의 산물이 아니다. 한중일 삼국 간의 혐오의식은 민족주의를 앞세운 선동에 가까운 감정이거나,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경험을 일반화한 경우이다. 이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상호노력을 무력화시키고 상대방에 대한 미움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무지가 세상을 구원해준 적이 없듯이, 혐오가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경우는 없었다. 무지에 따른 혐오는 미운털이 박힌 것처럼 쉽게 제거할 수 없다.
한편 혐오는 존재의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무지의 산물이다. 자신과 성적(性的)으로, 지역적으로, 인종적으로, 종교적으로, 신체적으로, 이념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근거삼아 상대방을 혐오하는 것은 존재적인 존엄성과 다양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혐오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이에게 넘긴다는 점에서 책임전가이다. 자신의 불행을 부모의 탓으로 돌린다든가, 남성의 불행을 여성의 탓으로 전가하는 일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까지 하다. 한때 유행했던 ‘헬조선’이라는 말은 – 물론 이말 속에는 일말의 부분적 진실이 담겨있다손 치더라도 – 자신의 불행을 전적으로 국가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무책임한 혐오적 조어(造語)이다. 혐오의 말과 행동을 수없이 만들어낸다고 해서 자신의 감당해야할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나를 빼고 구성되어진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하고 있다.
한편 혐오는 자신의 불안과 공포, 절망과 회한, 질투와 분노, 치욕과 당황을 다른이에게 투영한다는 점에서 나약함의 증거이기도 하다. 나약한 개가 큰 소리로 짖어대듯, 타인에 대한 혐오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다.
마지막으로 혐오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오만함에 결과이기도 하다. 오만함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재벌가 딸의 땅콩회항 사건이나 직원 구타 사건, 타인에 대한 인격모독 등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잘못된 태도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큰 잘못에는 무한히 관대하면서 남의 사소한 잘못은 성내며 지적질해대는 일이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하다.
혐오의 고고학
혐오의 역사는 길고, 혐오의 대상은 다양하며, 혐오의 태도는 복잡하고 혐오의 뿌리는 깊다. 눈에 보이는 혐오는 차라리 쉽게 파악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혐오는 그 뿌리를 찾기조차 힘들다. 따라서 혐오의 감정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일시적 교육이나 캠페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상이다.
혐오의 뿌리는 차별에서 시작하였다. 인류가 시작된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성적 차이를 성적 차별의 근거로 삼아 사회적으로 역할을 다르게 부여했다. 종족적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아 다른 종족을 침략하고 살해했으며 노예로 만들었다. 아후로 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차별을 받아들이는 존재를 순치시키고, 차별을 반대하는 존재를 격리와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다. 공동체 내부와 바깥에서 적과 아를 만들어 대립시켰다. 적에게는 부정적 이미지를 생산하여 덮씌우고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했다. 전쟁이 미화되었다.
폭력적인 시기에는 총과 칼로, 평화적인 시기에는 돈과 지위로 이 차별의 역사를 지속되고 있다. 차별의 극단적 감정이 바로 혐오이다. 그리고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종교와 제도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고 있다. 순치된 혐오인 차별과 격화된 차별인 혐오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우리 사회에 널리 펴져 있다. 그 차별과 혐오의 웅덩이에서 그 물을 먹고 자라난 생명체가 차별과 혐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는 하늘에서 별따기에 가깝다. 우리는 온몸으로 차별과 혐오를 뒤집어쓴 채 살고 있다.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기
그러니 차라리 차별과 혐오 없는 세상을 꿈꾸기에 앞서 우리의 존재가 차별과 혐오의 주체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는 차별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말자. 상대방을 제치고 경쟁에서 승리해야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모두 차별과 혐오의 자식들이다. 남들보다 잘나가겠다는 욕망이, 남들보다 잘 살겠다는 욕심이 존재하는 한 차별과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눈에 잘 안 보일 뿐. 눈에 띠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유지하는 수직적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내 발밑에 단 하나의 존재라도 존재하는 한, 내가 그 존재를 딛고 서있는 한 차별과 혐오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는 아름다운 말은 이념이지 현실이 아니다. 차별과 혐오에는 너와 내가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형태의 차이만 있을 뿐.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우선 바로 나 자신이 차별과 혐오를 유지시키는 존재임을 인정하자. 모든 변화의 시작은 바로 이 인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 말고 너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하여 너도이다. 우리는 모두 이 차별과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할 때 작은 변화라도 시작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큰 차별과 노골적인 혐오에는 거부감을 느끼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의식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작은 차별과 미소한 혐오에는 무대응으로 반응한다. 그렇게까지는 알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고 정당화하면서. 하지만 차별과 혐오를 없애려면 그 잔뿌리가 우리 일상의 어디에까지 뻗어있는지 찾아보는 섬세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혁명은 그렇게 작은 것에 대한 민감성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차별과 혐오를 인지하려는 촉수를 남에게 뻗치기 앞서 자신에게 향하게 하자. 우리의 몸과 마음, 감정과 생각을 세심하게 관찰해보자. 우리의 말과 행동을 반성해보자.
타자의 윤리학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주체철학은 기본적으로 타자를 대상화하여 내 시선으로 타자를 포획하고, 나의 이익을 중심으로 타자를 이용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너무도 오랜 기간 우리 사회에 기본적인 모델이었기에 우리는 아무런 반성없이 그 모델을 나의 모델로 삼아왔다. 그러면서 더욱더 자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성장해왔다. 차별과 혐오는 바로 이러한 주체철학에 서식하는 독버섯과 같은 감정이다. 내 기분 상하면 화나고, 내가 손해보면 못참는 곳에 차별과 혐오는 서식한다.
반대로 우리는 내가 기분 좋을 때 상대방의 기본은 어떨까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익을 볼 때 상대방은 어떠한 처지에 빠지는지, 내가 편할 때 상대방은 얼마나 불편하지 따져보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의 주체철학은 타자가 배제되거나 무시된 나만의 주체철학이다. 차별과 험오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려면 나만의 주체철학을 반성하고 타자의 윤리학을 정초해야 한다. 타자의 윤리학은 나와 너를 경계짓는 벽을 없애고 타자를 환대(歡待)하는 윤리학이다. 시끄러운 내 볼륨을 줄이고 타자의 소리에 마이크를 넘기는 윤리학이다. 내 주장을 관철하는 입의 윤리학이 아니라 타자의 불평과 불만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귀의 윤리학이다. 내가 있는 이곳의 윤리학이 아니라 네가 있는 그곳의 윤리학이다. 너로 인해 지금까지 내가 이익을 보았다면 이번에는 너를 위해 내 이익을 포기하는 윤리학이다. 너와 나의 거래가 아니라 너에게 주는 선물의 윤리학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
차별과 혐오가 없는 사회에 도달하는 길은 험난하다. 다시 말해 기쁨이 넘치는 행복으로 가는 길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장애물이 놓여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을 다 걸어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 장애물이 놓여있는 험난한 길을 걷는 행동 그 자체가 지극한 행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발명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지극한 행복은 참된 행동의 대가가 아니라 참된 행동 그 자체이다. 우리들은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극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극한 행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친절하고 멋진 주석을 남겼다. 이 주석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제 여기서 이르는 것으로서 내가 제시한 길은 매우 어렵게 보일지라도 발견될 수는 있다. 또한 이처럼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물론 험준한 일임이 분명하다.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서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