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癸卯年) 새해입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누구나 아직 이루지 못한 소망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미로, 혹은 습관처럼 점을 치기도 합니다. 저도 재미 삼아 하루운세를 타로점으로 봐봤습니다. 태양 카드가 나왔는데요. 태양 아래 벌거벗은 두 아이가 사이좋게 놀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는 일마다 행복하고 즐거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매우 긍정적인 날이라고 점괘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는 “그러나 너무 즐거운 나머지 경거망동하지 말아야겠습니다.”라는 경고문으로 기운을 살짝 눌러주네요.
물론 이런 점괘는 재미나 기분전환으로 할 일이지 크게 믿을 바는 못됩니다. 그 사람의 현재나 미래는 과거 삶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평소의 삶을 확 바꿀 수 있는 신박한 운명 따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고등종교나 철학은 하나 같이 요행수를 바라며 점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경상초의 제자 남영주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스승을 떠받들어 지도자로 삼고 싶어 하는 것에 기뻐합니다. 하지만 노자의 제자인 경상초는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라며 반성합니다. 제자 남영주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정치를 잘하여 요순시대와 같이 만들면 되지 않느냐며 반문합니다. 스승 경상초는 요순시대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큰 혼란의 근본은 틀림없이 요순시대에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 것은 결국 천세 뒤까지 존속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천세 뒤에는 반드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제자 남영주는 스승에게 더 가르쳐 달라고 말하지만, 스승 경상초는 자신은 재능이 작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으니 남쪽으로 가서 노자를 만나보기를 권합니다.
하여 남영주는 양식을 챙겨 짊어지고 칠일 밤낮이 걸려 노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앎과 알지 못함, 어짊과 어질지 못함, 정의로움과 정의롭지 못함에 대하여 묻습니다. 노자는 그가 사람(질문)을 많이도 같이 데리고 왔다며 여럿 대신 “하나를 품고, 그것을 잃지 말라”라고 답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삶을 지키는 방법[衛生之經]이라면서.
자, 그럼 재미로 점을 치는 대신, 장자 전체를 관통하는 위대한 도 하나를 지니는 능력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삶을 지키는 방법이란, 위대한 도 하나를 지니는 것이며, 자기 본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점치는 것에 의해 자기의 길흉을 판단하려 들지 않아야 하고,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인위적인 행위를 그만둘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자기를 충실히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행동은 자연스러워야 하고, 마음은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 인용구에 한문을 보시면 능력 능(能) 자가 문장의 첫 번째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홉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보통 ‘능히’라는 부사로 해석할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서술어로 사용되기도 하는데요. 여기서는 서술어로 풀어서 번역했습니다. 위생(衛生), 즉 삶을 지키려면 아홉 가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어린이가 되는 능력(becoming child)’입니다.
도대체 어린이가 무엇이길래, 노자는 ‘어린이 되기’를 삶을 수호하는 최고의 능력으로 꼽은 것일까요? “어린이는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데, 그것은 지극히 자연과 조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루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저리지 않은데 그것은 자연의 덕과 일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보면서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데 밖의 물건에 대하여 치우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어도 할 일을 알지 못합니다. 밖의 물건에 순응하고 자연의 물결에 자신을 맡깁니다. 이것이 삶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조금 뒤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이란 움직이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걷지만 자기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몸은 마른 나뭇가지와 같고, 마음은 식은 재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화(禍)도 닥칠 수 없고, 복(福)도 찾아올 수 없습니다. 화복이 있지 않은데, 어찌 사람의 재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린이야말로 무위자연(無爲自然), 도(道)와 덕(德)의 경지를 의식하지 않고 실천하는 최상의 모델로 등극합니다. 이렇게 노자의 어린이론은 장자로 이어집니다. 서양현대철학에서 니체와 들뢰즈/가타리가 어린이론을 이야기하기 2천 년도 전에 말입니다. 그러니 새해에는 점을 치는 대신에 어린이가 되어보는 것이 어떨지요. 새해에는 당신과 내가 어린이처럼 ‘아무 걱정 없이, 슬픔 헤아림도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