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달린다 22 : 도(道)란 무엇입니까?
- 22편 <지북유(知北遊)>
누가 도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을 하는 사람은 [有問道而應之者]
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不知道也]
도에 대해 질문한 사람도 [雖問道者]
역시 참된 도에 대해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亦未聞道]
도란 물어서도 안 되는 것이며, [道無問]
물어도 대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問無應]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을 묻는 것은 [無問問之]
헛된 질문입니다. [是問窮也]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대답하는 것은 [無應應之]
진실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是無內也]
대학시절 지하철 역 근처에는 삼삼오오 돌아다니며 “도를 아십니까?”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적 호기심에 충만한 나는 그 질문에 매료되어 “당신은 도를 아십니까?” 되물었지요. 그들은 확신에 차서 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어이가 없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신흥종교를 전파하는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이 근본물음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적 대답에 매료된 사람들이 종교인이 되기도 하지요. 나 또한 그 신흥종파의 대답에는 적잖이 실망하였지만, 그들이 던진 질문은 진지하게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도란 무엇일까요?
장자 22편 <지북유(知北遊)>은 이 물음을 묻고 답합니다. 이 편은 물음과 대답의 향연입니다. 지(知, 앎)는 무위위(無爲謂, 하지도 말하지도 않음)에게 도를 묻습니다. 답이 없자 광굴(狂屈, 미치광이)에서 도를 묻습니다. 광굴을 대답하려다가 그만 둡니다. 마침내 전설적인 임금 황제(黃帝)에게 도를 묻고 답을 듣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답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무위위야말로 진실로 도를 알고 있는 자이며, 광굴은 도에 가까운 사람이고, 그대와 나는 도에 가까이 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입을 다물거나 대답을 망설이는 자는 도에 가깝지만, 도를 안다는 자는 역설적으로 도를 모르는 자가 됩니다. 허참.
물음의 향연은 계속됩니다. 설결은 피의에게 도를 묻고, 피의가 답하는데 잠이 들어버립니다. 그러자 피의는 화를 내기는커녕 크게 기뻐합니다. 순임금은 스승인 승(丞)에게 도를 묻습니다. 공자는 노자에게 도를 묻습니다. 공곽자는 장자에게 도를 묻습니다. 태청(泰淸)은 무궁(無窮), 무위(無爲), 무시(無始)에게 도를 묻습니다. 광요(光耀)는 무유(無有)에게, 염구와 안회는 공자에게 도를 묻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같은 대답을 듣습니다. “알 수가 없다. 알려고 하지 마라.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득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널리 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옳은 지식은 아니다. 모든 것이 그 원리로 살아가고 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지만, 감히 ‘이것이 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지극한 도에 이르려는 사람은 논하지 말아야 한다. 도를 논하는 사람은 오히려 도에 깜깜이[冥冥]에 불과하다. 도란 들을 수 없는 것이니 들은 것은 도가 아니다. 도란 볼 수 없는 것이니 본 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말한 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니 ‘이것이 도’라고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해, “모른다!”입니다.
마지막 부분에 공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한 이론이란 이론을 초월한 것이고 [至言去言], 지극한 행위란 행위를 초월한 것이다. [至爲去爲] 지혜로써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 하는 것은 천박한 일이다. [齊知之所知則淺矣]”
장자 22편은 노자 <도덕경> 1장의 해설편처럼 읽힙니다. “길을 길이라 말하면 영원한 길이 아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고, 있음은 만물의 탄생이다. 없음으로 우리는 신비를 포착하고, 있음으로 현상을 포착한다.(......)”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이 없음[無]의 경지에 도달해야 영원한 길에 들어서는 걸까요? 장자는 노자의 시를 이야기로 펼쳐냅니다. 노자의 ‘무(無)’는 장자에 이르러 무위(無爲), 무언(無言), 무용(無用), 무문(無問)으로 확장됩니다.
장자 내편의 마지막 편인 <응제왕(應帝王)>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혼돈(混沌)의 죽음입니다. 혼돈은 모름의 상태에서도 사방에서 오는 손님을 환대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손님들에 의해 인식의 구멍이 뚫리자(점점 더 알게 되자)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 사태를 맞이하지요. 장자 외편의 마지막 편이 바로 <지북유(知北遊)>입니다. 앎[知]이 도를 묻자, “모른다”로 답함으로써 생명을 되살리려는 장자학파의 분투가 보이시나요? 문명이 앎의 추구라면, 아마도 자연은 모름의 회복이지 싶습니다. 도를 찾아가는 길은 확신과 오만의 길이 아니라, 무지의 깨달음과 겸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