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고쳐쓰기 작업이 한두 달은 걸립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일주일쯤 쉬었다가 두 번째 고쳐쓰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대개 이때쯤에 한차례 긴 휴식을 취합니다. 가능하면 보름에서 한 달뜬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일단 작품을 진득하게 재운 다음에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쓰기에 들어갑니다.
이를테면,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우가 그렇다는 것인데 장편 소설 한 편을 쓰려면 일 년 이상(이 년, 때로는 삼 년)을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서 혼자 꼬박꼬박 원고를 쓰게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합니다. 그래서 오후에는 낮잠을 자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리 방해되지 않은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아무래도 운동 부족에 빠지기 쉬워서 날마다 한 시간 정도는 밖에 나가 운동을 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판박이처럼 똑같은 것을 반복합니다. 고독한 작업, 이라고 하면 너무도 범속한 표현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 고독한 작업입니다. 때때로 깊은 우물 밑바닥에 혼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도 않고 아무도 “오늘 아주 잘했어”라고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물인 작품이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일도 있지만(물론 잘되면) 그것을 써내는 작업 그 자체에 대해 사람들은 딱히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작가 혼자서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나는 그런 쪽의 작업에 관해서는 상당히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때로는 지긋지긋하고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 또 하루, 마치 기와 직인이 기와를 쌓아가듯이 참을성 있게 몸뚱이 쌓아가는 것에 의해 이윽고 어느 시점에 “그래,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작가야”라는 실감을 손에 쥘 수 있습니다. - <제6회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장편소설 쓰기> 중에서
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 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원자력발전은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고 따라서 선善이다’라는 발상이, 그런 발상에서부터 결과적으로 날조된 ‘안전 신화’라는 허구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회복하기 어려운 참사를, 이 나라에 몰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패배라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축을 공동체=커뮤니티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 <제8회 학교에 대해서>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현대문학, 2016)는 출판사의 의뢰없이 작가가 자발적으로 쓴 글이다. 하루키는 마치 청중이 앞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술술 써내려간다. 하루키가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 직업적 소설가란 무엇인지, 뭘 써야 하는지, 장편소설은 어떻게 쓰는지, 등장인물은 어떻게 구상하는지, 누구를 위해서 쓰는지 등등 평소에 소설가에게 궁금할 것 같은 내용을 친절하고 상세하게 밝힌다. 직접 읽는 것이 정리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듯하여, 보물처럼 건진 두 부분을 길게 인용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하루키식의 글쓰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분에게 강추한다. 직업적 소설가 35년의 경험을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