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소설을 써서 생계를 꾸리고 있다. 지금까지 세 권의 책을 냈다. 첫 작품은 행방불명된 피아니스트 연인을 찾으려는 조율사가 귀에 남은 음색을 실마리 삼아 악기점과 콘서트홀을 헤메는 이야기. 두번째 작품은 사고로 오른다리를 잘라낸 발레리나가 식물학자 연인과 함께 온실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세번째 작품은 염색체가 1번부터 차례로 녹아가는 병에 걸린 남동생을 간호하는 누나의 이야기.
전부 무언가를 잃는 소설들이다. 다들 그런 유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 오가와 요코, 《은밀한 결정》 20쪽에서
책은 책을 읽게 만든다. 오가와 요코의 장편소설 《은밀한 결정》을 읽게 된 계기는 한병철의 철학책 《사물의 소멸》을 읽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말 그대로 사물의 소멸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향수, 리본, 모자, 새, 장미, 그리고 소설도 사라진다. 사물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관련된 기억도 사라진다. 사물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주민들은 비밀경찰들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사라진다. 처음에는 사물들이 사라졌으나 결국 인간의 신체들도 하나하나 사라지고....
오가와 요코가 1994년도에 쓴 이 소설은 2021년에 와서야 우리나라에서 번역된다. 그 번역시기에 맞춰 오가와 요코는 이런 말을 전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체 모를 존재의 위협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끊어지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받는 지금, 미처 말로 하지 못한 생각을 문학이 대신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이란 인간에게 이토록 필요한 것입니다."
영문판 표지
원작 제목이 《은밀한 결정》이라 우리나라에서는 그대로 제목을 따랐지만, 영문판 제목은 좀더 스릴러에 가깝게 《기억 감시경찰(The Memory Police)》이라 붙였다. 아마도 상업적 고려를 더 한 듯하다. 난 이런 노골적인 제목보다는 상상력을 유발하는 원제를 선호하는 편이다.
각설하고. 처음에 인용한 부분은 소설 속 주인공인 소설가가 그동안 썼다는 소설을 언급하는 대목인데, 하나하나 다 흥미로운 소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소설가라 소설 속에 주인공이 쓴 소설도 한 편 등장한다. 목소리늘 잃고 타자기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타자수의 소멸 이야기. 소설 속 사물들도 소멸되고, 소설가가 쓴 타자수도 소멸된다.
사실 소멸이야기는 우주와 지구의 역사를 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필멸의 운명을 타고 났으니. 게다가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된 생물과 사라져버린 사물들은 부지기수니 누굴 원망하랴. 우리 인간은 소멸을 지연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가속시키는 존재다. 우리도 얼마 안 가 소멸될 것이다. 이 소멸이 저주일까, 축복일까.
<추신> 난 이번에 오가와 요코의 소설 쓰는 법을 이 책을 통해서 배웠다. 소설 쓰기의 두려움이 살짝 사라지고 흥미가 한껏 생겼다는 것을 기록에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