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일기 10 : 행사에서 일상으로

2023.7.13.

by 김경윤

가파도 매표소 직원 한 분을 사귀어 놓으니 가파도 생활이 한결 편하다. 가파도에 대한 소소한 정보는 다 이 분을 통해 얻는다. 택배를 보내고 받는 방법, 식료품을 주문하는 방법, 동네맛집 정보, 가파도 지역 정보까지 궁금한 것은 다 물어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오늘은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2022년 제주비엔날레 행사 때 폐가에 프레스코 작업을 한 장소를 소개해준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건물을 소개해 주었는데 오늘이 제2탄이다.

식사는 매표소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국집에서 해물짬뽕을 대접받았다. 나는 후식으로 가파도 청보리 미숫가루 주스와 우도 땅콩으로 토핑한 아이스크림을 대접했다. (가게 안에 청보리밭 일출 사진이 인상적이다.)

가파도에 오시면 매표소 바로 뒷쪽에 위치한 커피전문점과 중국음식점을 바로 발견할 수 있다. 두 곳 다 맛집으로 유명하다.

식사와 후식 사이 잠깐 짬을 내어 찾아간 곳이 폐허가 된 프레스코(벽화)가 그려진 폐가였다. 여기서 잠깐 설명이 필요한데 폐가는 사람이 더 이상 살지 않는 집이고, 폐허는 아예 더 망가져 살 수 없게 된 곳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라도 잘 수리하고 관리하면 명소가 될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집으로 개조하여 더 잘 이용할 수 있다. 내가 방문한 곳은 제주비엔날레 행사 때 초청받은 작가가 가파도에 있는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에 머물면서 작업하고 출품한 명소(?)였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여 지금은 밖에서는 집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안으로 들어가려 해도 풀들과 벌레들로 쉽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기로 했다. (풀과 벌레 따위를 무서워할 내가 아니다.) 풀들을 헤치고 들어가 보니 마당에도 풀이 무성하지만 이곳이 프레스코 작업을 한 예술적 장소임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집도 폐가가 되기 전에는 꽤나 운치 있는 사람이 거주했을 법한 근사한 창틀과 가운데를 마루 대신 돌로 구성하고 좌우 양쪽으로 방 2개씩을 내어놓은 독특한 구조를 띤 집이었다.

그 집의 벽마다 제주도(가파도)를 주제로 한 프레스코가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림을 감상해 보자.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포옹하고 어우러지는 작고도 아름다운 세계가 아직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은가? 작업한 지 1년 남짓 밖에 지나지 않아 작품도 거의 훼손되지 않은 이런 명소가 그냥 행사가 끝나자 푯말 하나 없이 폐허처럼 방치되고 있었다.

나는 그림에 흠뻑 빠져 감탄하며 집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밖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마당 밖으로는 넓은 청보리밭이 펼쳐 있고, 집 주위로는 아담한 돌담과 작은 텃밭터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집들은 거리에 문이 있어 집안이 훤히 보이는데 이 집은 골목을 끼고 들어가야 입구가 나오니 사생활도 확실히 보장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잘만 생각하면 이곳은 최고의 명당터일 수도 있다.)

내가 만약에 이곳을 개조하여 살 수 있다면, 아니면 예술재단이나 복지재단이나, 그 어느 행정단위에서든 예술적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을 활용할 수 있다면, 예술가에게는 창작과 생활의 터전으로, 지역에서는 예술과 문화의 산실로 상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도 아니라면 가파도의 문화관광지로라도활용될 수 있다.)


지난 편 매표소 직원이 보여줬던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도 국내 유수의 재벌 기업이 투자하며 엄청 근사하게 지어놨으나, 비엔날레 행사 이후에 텅 빈 채 문마저 잠긴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다. 예술인이 거주하라고 만들어놓은 장소에 예술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이 전시 행정과 행사 위주의 관리 시스템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위대한 예술은 행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는 행사를 위해 창작하는 자가 아니라 생활에서 얻은 영감으로 창작하는 자다. 그러니 제발 건물이나 행사 같은 데 지원하지 말고 일상을 지원하시길. 비와 추위와 더위는 가릴 수 있는 공간 보장과 최소한 밥이라도 넘길 수 있는 생활을 보장하고 나서 예술가의 자질이니 수준이니를 논하시길 바란다.


우리 어머니 말마따나 "예술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술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술이 없는 밥과 술은 노예나 짐승의 상태로 우리를 추락시킨다.

갑자기 폐허가 되어버린 예술작품을 감상하다, 화딱지가 나 괜히 흥분조의 글이 되어버렸다. 이러려고 가파도에 내려온 것이 아니었는데, 가파도도 역시 마냥 평안한 곳은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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