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에서 살면서 오늘이 개인적으로 가장 바쁜 날이었다.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알람소리에 영락없이 8시에 깼다. (도시에 살 때는 알람소리를 듣지 못해 10분 간격으로 3개나 연속으로 맞춰놓기도 했는데.) 10시에 한병철 책으로 줌수업이 예약되어 있었기에 조금은 긴장했는데, 긴장 때문에 깬 것이 아니라 깨지 않고 푹 잔 결과였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고양이집사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식사를 챙겨주고 물을 갈아주고 똥을 치우고 주변을 정리하는 일이 나의 일과 시작이다.(고양이들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에게 다가와 야옹거린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주인행세만 할 줄 알았지, 집사로서의 역할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접만 받았지, 대접할 줄 모르는 삶인 줄로 모르고, 잘난 척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 자꾸 부끄러워지는 요즘이다.
고양이집사 일을 마치면 나를 대접하는 집사 역할을 수행한다. 집안을 청결하게 청소하는 일, 정성스레 식사준비를 하는 일, 좋은 그릇에 음식을 정갈하게 담는 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려놓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일, 설거지를 하는 일, 다음 식사를 준비하는 일, 시간이 되면 산책하는 일 따위가 나를 돌보는 집사의 역할이다. (그동안 나는 나를 얼마나 함부로 대했던가.)
지금은 가파도에 없는 친구의 훈련과 교시(?) 대로 나는 나를 챙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 홀로 이중의 집사역할을 한지 나흘 째다. (마치 아기 걸음마를 배우듯이 천천히 집사 역할에 적응하고 있다.) 앞으로 보름 넘게 가파도 생활을 하다 보면 이 집사생활이 몸에 밸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면 이렇게 훈련된 삶이 꽝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몸에 밴 만큼 오래가기를 소망한다. 지금 집사로서의 나의 삶이 참 좋다는 말이다.
9시에 아침식사로 모닝빵을 굽고, 계란프라이를 하고, 어제 만들어 냉장한 차를 준비한다. (커피만 마셨던 내가 아침에 차를 마시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아참, 9시에 가파도 배편의 실시간 운항 정보를 확인한다. 가파도 주민이라면 누구나 하루 시작은 배가 뜨느냐 마느냐를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 풍랑주의보가 떠서 전체 배편이 결항이다. (즉, 여행객을 받는 가파도 주민들은 오늘 공친 날이란 뜻이다.) 아무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다. (오늘 하루는 섬이 조용하겠구나.)
오늘은 집사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교사로서의 역할도 있다.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를 점검하고, 오늘 강독의 핵심 포인트를 다시 확인하는 일, 2시간 동안 진행할 내용의 속도와 정도를 미리 시뮬레이션해 본다. (마치 수술을 앞둔 의사가 수술의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듯이.) 수업이 매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매번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수업은 12시가 넘어서 끝났다. 벌써 점심시간. 점심은 간단히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고, 저녁식사를 위해 카레를 만들기로 한다. 국수는 끓는 물에 3분 30초를 시간 맞춰 삶다가 차가운 물에 깨끗하게 헹군다. 부드럽게 손빨래하듯이. 그 위에 고명으로 김치와 주민께서 주신 오이와 고추장아찌를 잘게 썰어 올리고, 초고추장을 기본 베이스로 해서 노란 설탕 반스푼, 참기름을 살짝 두른다. (지난번 국수는 5분을 끓여 풀어진 느낌이었다면, 이번에 국수는 최상의 상태다.) 넓은 자기 그릇에 담아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고양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을 쓴다. A4용지 한쪽 분량이지만 생각하고, 쓰고, 고치는 데 최소한 3시간은 소요된다. 이번에는 딱 3시간 10분 정도 걸렸다. 완성된 원고를 발송하니, 어느덧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다.
카레는 곧장 만들어 먹기보다 한 번 초벌로 만든 다음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정도 숙성시켰다가 다시 데워 먹는 것이 맛있다. 감자, 고구마, 양파, 당근, 비계가 좀 있는 돼지고기를 카레의 재료로 다듬는다. 카레는 지난번 제주도에 갔을 때 4인분짜리 고형카레를 구입해 두었다.(고형카레는 가루카레보다 깊은 맛이 난다.^^) 양파를 기름을 둘러 볶다가 캐러멜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고기를 넣어 같이 볶는다. 고기가 살짝 익을 때쯤 나머지 재료를 넣고 물을 적당량 부어 끓이면 끝이다.
간단히 집 앞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배가 출출하다. 밥도 다 되었다. 카레를 다시 끓여 농도를 높이고 나서 밥 위에 카레를 얹어 잘 비벼서 반찬과 먹으면 소박하지만 든든한 저녁식사 거리다.
공정을 다 찍어둘까 하다가 요리책을 쓰는 것도 아닌데 싶어 결과만 찍었다. 이렇게 자세히 적어놓고 보니 마치 먹는 거에 미친 인간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다 이 정도의 공정을 통해서 밥상에 오른다. 우리가 하지 않아 모를 뿐이고, 엄마(?) 집사님을 통해서 늘 우리는 이런 대접을 공짜로 받았을 뿐이다.
수업도 하고, 원고도 썼지만 가파도에서 나의 기본값은 고양이집사이자 나의 집사노롯을 하는 것이다. 가파도에 있는 동안 고양이들과 나를 잘 보살피는 생활을 잘하고 싶다. 처음에 올 때는 야심차게 책 한 권 쓰고 나가야지 생각했는데, 이제 그런 쓸데없는 욕망은 지웠다.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차분히 대접하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만할 것만 같다. 그리고 하루 한 편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 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