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일기 12 : 보이지 않는 손길

2023. 7. 15.

by 김경윤

토요일이다. 토요일이지만 가파도에서는 의미 없다. 이곳의 주민들은 섬에 들어오는 뱃시간에 따라 하루 스케줄을 맞춘다. 오늘 배편을 보니 오전에는 풍랑주의보로 배가 뜨지 않고, 오후 1시부터 배가 이동한다. 주민들의 바쁜 하루는 오후부터 시작된다.

아침에 여유롭게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차를 내리고 (차는 냉장에 보관한다.) 어묵탕을 만들기 위해 물을 올린다. 커피를 들고 마당으로 나와 고양이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밥(?)을 주고 물을 갈아준다. (주말이니 특식으로 아침부터 참치튜브를 짜서 준다.) 밥을 챙겨줄 때를 조금이라도 놓치면 먹자(노란 어미고양이 이름. 하도 많이 먹어서 그렇게 내가 지었다.)가 창이나 문을 두드리며 야옹 댄다.

말이 나온 김에 임시로 고양이들의 이름을 지었다. 먹자, 비비자, 놀자, 달리자, 싸우자, 숨자로.(먹자와 비비자는 어미 고양이 이름이고, 놀자, 달리자, 싸우자, 숨자는 새끼 고양이 이름이다. 직관적 작명법으로 지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샤워를 간단히 하고 거실에서 창을 바라보며 아침식사를 한다. 사진만 보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운치 있게 식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창문 밖은 바람 불고 벌레가 들끓고 거미가 줄을 치는 정글(?)이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명과 자연이 교차한다.

오늘 오전에는 배가 뜨지 않으니 산책을 해도 좀처럼 주민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설거지를 하고, 마당에서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식은 커피를 천천히 마신다. (내가 만든 마당 커피점이다.) 커피를 다 마신 후, 옷을 간편하게 입고 자전거를 끌고 마당을 나선다.

내가 정한 자전거 산책길은 세 코스다. 청보리밭길 중앙을 가로질러 상동에서 하동으로 도는 코스, 하동(내가 있는 집)에서 상동으로 해안가를 따라가는 코스, 섬 전체를 한 바퀴 다 도는 코스. 오늘은 여유롭게 섬 전체를 한 바퀴 돌기로 한다. 10시쯤 나왔으니 중간 쉬어도 점심시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풍랑이 심하게 몰아친 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해안가는 온통 부유(浮流) 쓰레기들로 넘쳐난다. 간밤에 파도가 데려온 것들이다. 주민들이 버린 것은 아니지만 가파도의 아담하고 청결한 이미지를 많이 훼손시킨다. (이 많은 쓰레기를 누가 주울까?)

자전거를 타고 상념에 잠기는데 갑자기 한 구간에 도달하자 해안가가 깨끗하다. 놀라서 주변을 살피니 누군가가 쓰레기를 주워 마대에 담아 놓았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해안가 쓰레기를 줍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던 것이다. (나라도 주워볼까 망설이던 마음이 부끄러웠다.)

마음이 개운해지며 상동 쪽으로 페달을 밟는다. 상동 매표소에 도착했지만, 매표소도 가게들도 문이 닫힌 상태다. 잠시 앉아 물 한 잔 하며 숨을 돌린다. (자전거를 탈 때는 물을 꼭 챙긴다.)

이제 다시 반대쪽으로 돌자. 해지면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다는 해안가에서 포클레인으로 돌담을 무너뜨리고, 무너진 돌덩이로 다시 담을 만드는 일군의 일꾼들을 만난다. (지난번 매표소 직원이 알려준 제주도 전통 돌담을 연구하여 보존, 복원한다는 회원분들이 틀림없다.) 자전거에서 내려 인사하고 나를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가파도에서 한 달 살기 하는 작가입니다."

"가파도에서 한 달씩이나? 한 달 동안 뭐 하세요?"

옆동료가 말을 거든다.

"뭐 하긴, 작가분이니까 영감을 떠 올리시겠지."

나는 씩 웃으며 대답한다.

"아니요, 영감을 지우고 있습니다."

"영감을 지워요? 그런 일로 시간을 보냅니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작업반장처럼 보이는 분이, 쉰소리 집어치우라는 듯, 다시 작업을 종용한다. 나도 무안해져 몇 가지 정보를 얻고 자리에서 인사하고 물러난다. 한 번 돌담 작업을 하면 그 지역에서 숙식을 하면서 한 두 달 작업기간을 갖는다는 것, 하루 작업 종로시간을 대강 4시쯤이라는 것. (아마도 4시는 본토로 떠나는 뱃시간에 맞춘 것 같다.)

그분들에서 사진 허락을 받고 현장 사진을 찍었다.

이것도 인연이니, 내가 가파도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뵙고 막걸리나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오늘 인연이 그 첫 단추였기를.)


섬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와 어제 만든 카레와 아침에 만든 어묵탕으로 점심을 먹는다. 밥을 먹고 창과 문을 활짝 열고 집안 환기를 시킨다. 문이 활짝 열리자, 바깥에서 놀고 있던 먹자와 비비자(검은 어미 고양이)가 거실로 잽싸게 들어와 나의 눈치를 본다. 나는 그들은 더 이상 밖으로 내쫓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내 일을 한다. 비비자는 이내 나가버리고, 먹자는 거실에 배 깔고 눕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람이 시원하게 집안에 돈다. 살짝 졸려 나도 배 깔고 거실에 눕는다. 한 한 시간쯤 잤으려나, 일어나니 온몸이 개운하다.


몸이 근질근질(?)하여 간단히 물샤워를 하고 다시 자전거를 끌고, 해안가 매표소로 향한다. 쇠뿔도 단 김에 뽑으랬다고, 해안가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plogging)을 신청해야겠다. 오늘은 3시 20분에 떠나는 배가 마지막이니, 매표소가 아직은 열렸을 것이다. 도착하니, 바깥에서 나를 발견한 직원이 반갑게 인사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산책을 하면서 쓰레기를 주울 테니 마대자루를 좀 달라했다.

직원은 반색을 하며, 이와 플로깅을 하시는 김에 오전에 배가 도착하는 선착장 주변의 해안가를 부탁한다며 영역도 지정해 준다. Why not! 직원은 창고로 들어가 마대자루와 장갑을 가져 나온다. 나는 마치 자격증을 받은 듯 소중하게 그것들을 받아 든다.

직윈이 빙그레 웃으며 아내가 본토에 갔다가 이번 배로 들어오는데 나에게 줄 선물이 있다고 조금만 기다리란다. 시간을 보니 배가 들어오려면 20분쯤 남아있다. 나는 잽싸게 돌담작업하는 곳으로 자전거를 달렸다. 작업장에 도착했는데 어느새 오늘 작업이 끝나 깨끗한 돌담이 세워져 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멋지게 세워진 담을 만든 손길에 큰 박수를 보냈다. 박수받으려고 하신 일은 아니었겠지만, 이렇게 남들은 관심도 없는 소중한 것들을 보존하기 위해 일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기에, 이곳이, 우리나라가, 지구가 지켜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다시 배가 들어오는 선착장으로 돌아가니, 매표소 직원의 아내분이 빵과 잼을 나에게 내민다. 입도를 환영하는 선물이라면서. (내가 빵과 잼이 떨어졌다고 직원에게 지나가는 말을 했는데, 그것을 세심히 기억하고 있다가 구매해 준 것이다.) 아하, 곳곳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어 우리의 삶이 쾌적하고, 윤택하구나!

나는 자본의 냉철한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인간의 따뜻한 '보이지 않는 손길'을 경험하며 하루를 보낸다. 구름 끼고, 바람 불고, 비가 몰아친대도 오늘은 참 따뜻한 날이다.





이전 12화가파도 일기 11 : 집사로 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