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일기 16 : 인연(因緣)

2023. 7. 18.

by 김경윤

간밤에 내리던 비가 아침이 되도록 그치질 않는다. 빗줄기는 더욱 세지고 굵어지고 바람도 불어 비가 45도 각도로 쏟아진다. 거실까지 비가 들이닥쳐 문이란 문을 다 닫았다. 배편을 확인하니 당연히 풍랑주의보로 하루 종일 결항이다. 이런 날은 비 그칠 때까지 조신하게 지내는 게 최선이다.

고양이들 챙겨주고 나도 간단히 빵과 잼, 커피로 아침을 해결한다.

주변에 인가가 없어 음악을 스피커로 크게 듣는다. 이곳에 보쉬(Bose) 스피커가 있는데 핸드폰이랑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들으면 웬만한 카페보다 사운드가 좋다. (소리 크게 틀어놓고 아침식사 하기는 도시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호사다.) 산책 나가기는 글렀고 오늘은 뭘 할까 고민하는데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하늘이 환해진다. (이곳 날씨가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기에 잽싸게 만사 제쳐놓고 자전거를 끌고 마당을 나선다.)

자전거로 부지런히 달리면 1시간 안에 섬 전체를 돌 수 있다. 이제 해안가 길을 부처님 손바닥처럼 꿰고 있다. 청보리밭길 중앙로를 달려 상동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서 한 바퀴를 도는 길이 경사면을 고려할 때 가장 빠르고 힘이 덜 드는 길이다. 닫힌 가파도 매표소를 지나 돌담길 복원공사하는 길로 달려가는데 멀리서 트럭 한 대가 다가온다. 속도를 늦춰 천천히 페달을 밟는데 트럭 안에 인부들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제주돌담보존회 회원들이다.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지나친다. (오전 9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공사가 끝났나? 아니면 다른 곳을 공사하려고 이동 중인가?) 궁금증을 안은 채 계속 해안가를 달린다. 가파도는 언제 비가 쏟아졌냐는 듯이 맑다. 잠시 자전거에서 내려 해안가 풍경을 사진에 담는다. (넓게 파노라마 사진으로도 담아 본다.)

해안가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도 돌담 회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 철수?) 나는 다시 부리나케 선착장 근처로 가본다. 오늘 배도 뜨지 않는데 어떻게 철수하지? 매표소 앞에 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회원들이 삼삼오오 매표소 앞 밴치에서 쉬고 있다. 나는 부리나케 회장님을 찾아본다. (매표소 직원이 준 정보에 따르면 황토색 개량한복을 입고 있다고 한다.) 발견! 서둘러 앞으로가 내 소개를 하고 철수하시는 거냐고 물어본다. 회장님은 장마철이라 잠시 쉬었다가 다음 주에 다시 작업하려 온단다. 나는 다음 주에 꼭 한 번 뵙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명함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다. 회장님은 흔쾌히 명함 한 장을 건네준다.

저 멀리 바다에서 바지선 한 척이 가파도를 향해 온다. 아하, 중장비니 트럭이니를 실으려면 여객선으로는 어림도 없지. 나는 이곳으로 와서 바지선을 처음으로 본다. 중장비가 실리고 트럭도 실리고 회원분도 탄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몇몇 분은 웃으며 나에게 인사한다. 이것으로 끊어질 수 있었던 인연이 다시 이어진다. (비가 계속 왔다면, 비가 그쳐도 곧장 자전거를 끌고 나가지 않았다면, 나갔어도 반대편으로 돌았다면, 트럭과 마주쳐도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면, 그중 하나만 틀어졌어도 만남과 인사는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기이한(?) 인연을 신기해하면 집으로 돌아오니 느닷없이 하늘이 흐려지고 비가 쏟아진다. 5분만 늦었더라도 비를 쫄딱 맞을 뻔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이 재미나고 신기한 소식을 매표소 직원에게 전화하여 말해줬다. 직윈도 신기해하며 깔깔 웃는다. 나는 오늘 일도 없고 비도 오는데 점심때 집으로 와서 부추전이나 부쳐 먹자고 직원을 초대한다. 직원은 흔쾌히 동의한다. 10시가 조금 넘었으니 12시까지 2시간 남짓 남았다.

우선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확인한다. 부추는 친구가 사다 놓은 것이라 빨리 먹어치워야 한다. 야채통에서 부추를 꺼내 먹을 것과 버릴 것을 추린 후, 온전한 것을 전을 하기에 적당한 (손기락 두 마디?) 크기로 잘라 물에 깨끗이 씻어둔다. 새로 사 온 양파를 큰 것으로 골라 다듬고 씻어 얇게 썰어 부추와 합친다. 밀가루와 전분가루를 3:1의 비율로 물에 섞어 농도를 맞춘 후, 살짝 소금 간을 한다.

그러고 보니 부추전도 태어나 처음 해보는 것이다. (곁눈질로 배운 것이 제대로 되려나?) 손님이 오기 전에 두 장은 부쳐놔야지 생각하며 달궈진 프라이팬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넓게 한 장 크기로 재료를 펴서 한쪽 면이 익기를 기다리다가, 문뜩 해물탕 재료가 냉동실에 한 봉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잽싸게 냉동고 문을 열어 재료를 꺼낸다. 꽝꽝 얼어있다. (진작에 꺼내서 해동을 시켰어야 했다.) 급해동이 필요하다. 봉지를 뜯지 않은 상태로 물에 담아둔다. 아직 직원이 오려면 20분 정도가 남아 있다.

부추전도 맛있지만, 해물부추전이 훨씬 맛있으니까, 물속에 있는 언 해물을 손으로 주물럭대며 온도를 높여본다. 10분 전 첫 번째 부추전은 그럭저럭 완성이 됐다. 해물봉지를 뜯어 아직은 덜 녹은 해물 반을 부추전 재료에 쏟는다. (나머지 반은 다시 밀봉하여 냉동고로) 상온에서 덜 녹은 해물을 다른 재료들과 섞으며 마저 해동을 시키고 있는데,

직원은 작은 봉지에 탄산수 한 병과 복숭아 두 개, 빵또야 아이스크림 하나를 싸들고 방문했다. 나는 손님을 탁자에 앉으라고 권한 후 먼저 만들어놓은 부추전을 들라고 권했다.(생각해 보니 나 혼자 있을 때 초대한 최초의 손님이다.) 나와 직윈은 앉거니 서거니 하면서 조금은 부산한 점심식사를 했다. 나는 해물부추전을 두 장 구워 같이 먹었고, 탄산수를 나눠 마셨으며, 하나 남은 찐 옥수수도 레인지에 돌려 반씩 나눠 먹었고, 야채칸에 있었던 천도복숭아도 통째(?)로 대접했고, 마지막으로 카누 냉커피도 두 잔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며 마셨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정작 만들어 먹는 요리 사진은 하나도 남기지 못했지만, 두 시간 넘게 살아온 이야기, 제주도 이야기, 가파도 이야기, 집 이야기, 취업 이야기. 아이 교육 이야기 등을 종횡무진 흥미진진하게 나눴다. (가을에 다시 한번 오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게다가 어제 플로깅 봉사하신 분들이 쌓아놓은 쓰레기들이 제대로 마무리가 되어 있지 않아 해안가 쓰레기를 정리하러 가는 직원의 뒤를 따라가 나도 플로깅을 같이 했다는 건 안 비밀! 장장 3시간 넘는 시간을 직윈과 함께 보냈다. 즐거웠다. 나의 가파도 홀로 생활 최초의 초대손님, 가파도 생활에서 나에게 동아줄 같은 역할을 해준 직원이다. 아마도 이번에도, 혹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때에도, 나에게는 최대, 최고의 가파도 인연이 아닐까 싶다.

직원과 헤어져 돌아오니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아마도 오늘 날씨는 계속 변덕을 부릴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웃을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 보람찼다는 것이고, 그런 날의 인연들이 행복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우리가 돌아다니며 찾아야 할 파랑새가 이니라, 우리가 매 순간 매 장소에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인연이니까.


직원이 술을 할 줄 알았다면, 분명히 낮술 한 잔 같이 했겠지만, 직원은 술 한 잔 못하는 사람이라 탄산수와 커피를 마셨다. 오늘밤은 혼자라도 술 한 잔 해야지. 안주 없어도, 혼자 먹어도 분명 술이 달 것이다.

아참, 직원이 자신이 바르턴 버물리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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