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일기 17 : 가파도에서 가장 높은 곳

2023. 7.19.

by 김경윤

1.

단잠을 잤다. 이제는 잠을 자면 도중에 한 번도 깨지 않는다. (요 몇 년간 불면증으로 낮밤을 바꿔 살았는데, 그 증세가 가파도에 와서 싹 사라졌다.) 증세가 나은 이유를 찾아봐야겠지만, 가파도의 기후와 풍토, 그저 평안한 삶이 주는 무사태평의 마음이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무사태평한 시간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으로서 살아야 하는 임무를 방기하고, 내가 치러야 할 공적(?) 삶도 누군가에게 넘겨야지만 간신히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나의 무사태평은 많은 사람의 노동과 노고의 대가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다. 누군가 편하게 쉬려면 누군가는 죽도록 일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우연하고도 느닷없는 휴가를 만끽해보려고 한다. 명산명소를 찾아다니며 전국맛집을 들락거리는 휴가가 아니라, 조용히 한 곳에 머물고 제 손으로 삼시 세 끼를 해결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휴가다. 매일 똥거리(장모님이 이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닐 수도 있다.)를 만들고 먹고 치우는 수고는 해야겠지만, 단식하는 수도승이 아니니 최소한의 노동은 해야 한다.

게다가 최근에 책을 읽다가 네발짐승이 아니라 두발짐승으로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는 최소한 일정량을 걸어야 삶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의 내 삶의 모토가 삼보승차(三步乘車)였는데, 이제는 포기해야 될 때가 온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 해안가를 거닐 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이족보행의 능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2.

낮에 매표소 직원이 전화를 했다.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를 담당하는 매니저를 봤는데, 자신이 있는 동안 건물 내부를 견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샤워를 하고 의관정제(?)를 하고 직원을 만나 가파도에서 제일 높은 건물로 향했다. 가파도 언덕은 해발고도 20.5미터에 전망대라고 설치한 곳이 2.5미터인데, 적어도 이 건물은 고도가 20미터는 넘는 곳이고, 일반인이 구경할 수 있는 지하공간이 아니라 탑으로 올라갈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건물에 도착하자 매니저가 문을 열어준다.(지난번에 왔을 때, 굳게 닫힌 문이었다.) 문이 열리자 지네 한 마리가 후다닥 나오며 길을 터준다.(아이고, 놀라라.) 매니저도 당황한 듯, 지하라 습해서 지네가 많아 걱정이라 말한다. 우리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매니저는 마음껏 구경하고 사무실로 오시면 차 한 잔 대접하겠다고 말하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매표소 직원과 나는 건물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매표소 직원은 작년도 제주비엔날레 때 여기서 지원봉사를 했기에, 누구보다 건물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직원을 따라다니며 풍광을 사진에 담는다. (자연의 시간을 따라 스스로 낡아가는 건물의 풍경은 묘한 정서를 자극한다. 무상감(無常感)이라고 해야 할까?)

아티스트들이 작업했던 공간에 들어가 본다. 지금은 아무도 묵고 있지 않기에 거의 방치된 공간이다. 그런데 거기 큰 캠퍼스에 멋진 작품(?)이 떡하니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자세히 다가가 살펴보았더니 빈 화폭에 곰팡이들이 삶의 무늬를 새겨놓은 것이었다. 장마라 날씨도 습하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아 곰팡이들이 자신의 서식처로 삼아 살고 있었다.

생명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인간의 공간이라고 만들어 놓은 곳 역시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다. 바람과 햇빛과 물이 공존하는 공간이라면 그 어느 곳에서든 만물은 깃들고 성장하고 번식한다. 우리 인간은 그 만물의 공간에 잠시 세 들어 살면서도 천만 년 살 것처럼 행세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만물의 것이 되고 만다.

습기 차고 곰팡이 냄새나는 반 지하공간에서 벗어나 이 건물의 가장 높은 타워에 오른다. (심지어 건물 안에는 타워에 오를 수 있는 엘리베이터도 있다. 장애인을 위한 배려인가? 물론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다.) 걸어서 한층 한 층 오를 때마다 가파도의 풍경이 달라진다. 맨 꼭대기층에 오르니 바다 건너 제주도의 산들이 눈앞에 선명히 나타난다. (저 멀리 구름 모자를 쓴 것은 한라산인가?) 나 혼자 잠시 보기에 아까워 카메라에 담는다. (파노라마로도 담았다.) 아마, 가파도에서 유일하게 이 각도에서 조망한 사진일 것이다.

가파도 언덕 높이에 건물 높이까지 더하면 최소한 40미터의 높이에서 찍은 사진이다. 게다가 날씨도 쾌청하니 가파도 생활에서 소중한 행운의 시간이리라.

이번 기회를 마련해 준 직원분에게 정말로 감사하다. 그냥 지나치면 그만인데,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최고의 경험을 마련해 주려고 자신 시간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직원분 덕분에 호사를 누리고 있다. (언제 내가 사는 고양으로 온다면 나도 시간을 내어 정성껏 대접하고 싶다.)

뱃시간이 빠듯하여 바삐 구경하고 다시 매표소로 갔다가. 배 떠나고 잠시 짬을 내서 늦은 점심으로 김밥과 와플을 대접했다.(직원분은 본인 사진을 찍히고 싶어하지 않아, 인물은 비밀의 베일에 감춰둔다.)

직원분이 본토 마트에 물건을 시킬 일이 있어, 나도 곁다리로 내가 필요한 물품을 추가한다. 밀가루(중력분), 카레가루, 호박, 쪽파, 배추, AAA건전지 2개, 얼음(큰 거). 오늘 마지막 배로 배달된다고 하니 식재료가 풍성해질 것이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직원분은 관광객이 기다리는 매표소로, 나는 고양이들이 기다리는 내 집(?)으로. 오늘 남은 하루도 평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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