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30여 권의 책을 쓰고, 관련된 강의를 하고 지낸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한때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거의 모든 강의는 단절되었고 회복될 기미마저 없다. 이제 (나의) 인문학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인문학을 붙들고 있는 내가 처량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책 읽고 글 쓰고 강의하는 능력 이외에 별무소용한 인간이 되었다.
놀던 물은 점점 말라가지만, 주변에서 뿌려주는 한 스푼의 물로 입술을 적시며, 아직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에 안도(?)하며 지낸다. 돈 되는 일은 하지 않고 돈 안 되는 일만 사서하고 있다는 핀잔도 더러 받지만,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닌지라, 하찮은 연대라도 괜찮은 활동이라 생각하며 지낸다.
그 연대(?) 활동 중의 하나가 한양문고 주엽점에서 한 달에 한번 진행하는 '진짜인문학' 행사에 사회를 보는 것이다. 내가 사무실을 세내어 살고 있는 곳이 일산에 위치한 한양문고다. 책 팔아먹고사는 서점이니 영리사업을 주로 해야 하는데 이곳은 돈 안 되는 일도 곧잘 해낸다. 그 사업 중 하나가 '진짜인문학'이다.
매월 첫째 주 월요일 7시에 한양문고 한강홀에서 진행한다. 오늘은 조이한 미술사가가 쓴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이라는 책을 텍스트로 <페미니즘 관점으로 보는 미술사> 강의가 있다.
나는 이 행사의 사회자로 조이한이 쓴 책을 먼저 일독하였다. (그게 사회 보는 사람의 최소한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남성(!)독자로서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여성의 관점과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술작품들의 새로운 해석에 낯섦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꼈다. 남성이라면 결코 쉽게 포착하지 못했던 역사적 의식과 사회적 불평등을 차분히, 때로는 선동적으로 이야기하는 저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관심이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
아참, 늘 듣는 불평인데 '진짜인문학'이라는 용어를 지적하며, 그런 게 과연 있느냐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물론 진위를 객관적으로 판별하는 기준이 없으니, 진짜와 가짜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자의적으로) 생각하는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성숙해지게 만드는 인문학, 자기 테두리를 두텁게 만들기보다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인문학, 타락보다 고양을 꿈꾸는 인문학, 이기심만큼이나 연민과 연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인문학, 나를 낯설게 하고 경이와 새로움으로 나를 갱신하는 인문학을 나는 진짜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문학은 귀한 것이어서, 귀한 만큼 만나기 어렵다.) 이번에 조이한의 강의도 그런 점에서 '진짜인문학'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와서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