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전집 7권
예술이란, 불러내는 것. 먼 데 것을 불러내는 것. 가라앉은 것을 인양하는 것. 침몰한 배를 끌어올리는 것. 기억의 바다에 가라앉은 추억의 배를 끌어내는 것. 바닷가, 표류물(漂流物)을 벌여놓은 바닷가, 그렇게 캔버스 위에 기억의 잔해 찌꺼기들을 그러모으는 일 — 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내게는 기술이 없다. 연장이 없다.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갈 체력이 없다. 체력. 그럼. 체력이 없지. 이젠. 예술은 체력 없인 안 된다. 자본이 있어도 안 된다. 해녀여야지 조합장이어서는 안 된다. 조합장은 장부 위에 숫자와 전표만 만진다.(74쪽)
<하늘의 다리>는 최인훈이 1970년(36세)에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김준구(화가)와 그의 친구 한명기(소설가)이다. 월남하여 독신으로 삽화를 그리며 근근이 살아가는 화가 김준구에게 고향에서 학창시절 은사로 지냈던 한동순의 연락이 온다. 그의 딸 성희를 찾아달라는 부탁으로 성희를 찾고, 몇 차례 성희와 만났지만, 결국 별 진전 없이 성희가 사라져버린다. 설상가상으로 은사였던 한동순마저 부산에서 사망하고, 일의 실마리는 미궁에 빠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두 예술가(화가/소설가)가 겪는 심리와 대화를 다룬다.
희한하게도 최인훈 소설의 주인공들은 몇 가지 조건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실향민(변방인), 예술가(지식인), 솔로(외로움) 등이다. <두만강>의 등장인물이 강물의 자식이듯, <하늘의 다리>의 등장인물은 바다의 자식이다. (그들은 바다를 통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강물과 바다는 단절과 죽음의 상징임과 동시에 연결과 재생의 상징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 논리와 환각이 교차하고 중첩되어 소설 속 사건들을 더욱 깊게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이 소설은 1970년 3월 17일에 일어났던 정인숙 피살사건과 4월 8일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가 소설적 배경이 되고 있다. (고 지인에게 들었다.) 소설에서도 슬쩍 지나가는 사건처럼 언급되고 있는 이 두 사건은 권력형 비리사건이었고, 전자는 아직도 의문사로 남아있다. 소설 속 김준구는 피살사건의 사진을 보면서 한동순의 딸인 성희를 떠올린다. 소설 속에 그로테스크하게 계속 등장하는 하늘의 걸린 잘린 다리를 화가인 김준구는 환각적으로 보게 되고, 거기에 성희를 다리를 중첩시키고, 피살사건의 사진에서 나온 다리도 중첩시킨다. 개인사와 사회사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인훈의 소설은 당대 사건에 대한 소설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사회적 사건에 대한 소설적 대응이라고만 말하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놓치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삶 속에서 문학(예술)이란 무엇인가? 문학(예술)의 기능과 의무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탐색이다. 위의 인용구 역시 스승의 장례식을 치르고 거리로 나서면서 떠오른 김준구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작가란 "해녀여야지 조합장이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 가슴에 팍 박힌다.
이 소설 속에는 문학(예술)에 대한 이러한 진술이 화가인 주인공뿐만 아니라 소설가인 한명기의 생각과 대화를 통해 자주 등장한다. 최인훈 작가는 이러한 생각을 의식의 흐름, 또는 자동기술법을 사용하는 듯, 현란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 최인훈은 화자 김준구의 입을 빌려 예술하기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예술이 자유의 나라라는 얘기, 거짓말이다. 예술은 폭력의 나라다. 폭력의 근거를 따질 마음이 일지 못하게 강제된 폭력의 세계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술을 만들지 못한다. 무서움. 삶의 무서움에 대해서 또 하나의 무서움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예술이다. 아름답다는 것 — 아름다움은 흉기(凶器)다. 흉기를 만드는 사람은 흉기보다 더 흉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만든다는 것을 즐기는 일만이라면 예술은 꽃이다. 그러나 만드는 쪽에 서면 — 예술은 흉기, 즐기면서 만든다? 즐기면서 만든다? 엿장수 맘대로 되는 일인가? 꽃인 줄 알고 달았던 가슴의 장식이 한 자루의 칼로 변할 때, 공중(公衆)의 눈앞에서, 문득 준구는 제정신이 들었다. 흉기는 웃고 있었다.”(54쪽)
예술하기는 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흉기를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 흉기를 만드는 사람은 흉기보다 더 흉악해져야 한다는 것을. 사회적 참사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모질고 차갑고 잔인한 시선을 간직할 때 비로소 예술을 만들 수 있다는 섬뜩한 자각을 하게 만든다. 아, 예술 참으로 어렵다!
<보너스>
1970년 11월 17일 신문회관 3층에서 이헌구 선생의 주례로 12살 아래인 원형희 씨와 결혼했다. 36살에 결혼했으니 당시로는 조금 늦은 결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