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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쭉 빼쭉 남편

호박죽

by 빨간지붕

휴일 아침.

일하지 않는 은퇴부부지만 그래도 우리는 휴일은 꼭 챙겨서 쉰다.

주중에는 서로 다른 취미생활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여행이나 특별한 행사도 주로 주중에 다니다 보니 휴일에는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우게 된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순댓국, 부대찌개, 밀면, 내장탕 중 골라봐"

아침밥 숟가락을 놓으며 하는 남편의 말이다. 나는 잠시 멍하여 망설이는 동안,

" 음, 먹기 싫다고? 오늘은 맛있는 점심을 못 먹겠군 "

샐쭉한 말투가 날아온다.

외식을 하자는 말인데 게으름 피우는 아내가 외출은 싫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퇴직 후 유난히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는 남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한다. 더없이 친절한 남편이었다가도 불현듯 생판 남인 듯한 남편이 되기도 한다.

나는 잠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럴 때의 최선의 방책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남편이 있는 거실을 벗어나 베란다로 나와보니 엊그제 친구네 과수원에서 따온 뚱뚱한 늙은 호박이 눈에 띈다. 그래 오늘은 삐쭉이 빼쭉이 남편을 위해 호박죽이나 끓여야겠다.

커다란 호박을 들고 부엌으로 오니 기분이 조금 괜찮아진다. 꽤 단단한 호박은, 칼이 들어가지 않아 망치까지 동원되어 두드리며 잘라내고, 씨 빼고, 껍질 까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정리하기까지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참치를 해체하는 것도 아닌데......

압력밥솥에 깍둑썰기를 한 호박과 찹쌀을 넣어 30분 정도 끓인 후 덩어리 진 호박을 풀어주면 호박죽이 완성된다. 그 사이 남편은 헬스라도 다녀오는지 현관이 시끄럽다.

노란 호박죽으로 차린 점심상을 보고는 마지못해 한 숟가락 떠먹던 남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돈다.

"이게 뭔데 이렇게 맛있어? 이걸 언제 그사이에 만들었어?"

다시 좋았다로 코드 전환이 된 남편의 마음이 다 보인다. 호박죽 하나로 기분이 바뀐 남편이 다시 친절한 남편으로 돌아왔다.

늙은 호박에 찹쌀과 물을 넣었을 뿐인데 은근한 단 맛은 아무리 먹어도 과하지 않은 자연스럽고 순박한 맛이다. 이 순박한 호박맛에 남편의 병?이 사라진 것일까?


내일은 호박전을 부쳐보자 늙은 호박전 맛은 또 어떨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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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맛 노란 호박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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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둑썰기 한 호박을 잔뜩 넣고 ( 1,000g ), 불린 찹쌀 한 컵에 물 7컵을 넣고 압력밥솥에서

30분 정도 끓인 후, 덩어리 진 호박을 풀어준다. 식성에 따라 소금이나 설탕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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