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by 정보라

한국판 환상특급 - Revenge

by EL

80년대 KBS에서 방영된 환상특급이라는 추억의 미드가 있다.


어렸을 적 나는 전설의 고향은 못 봤지만 환상특급은 항상 챙겨 본 기억이 있다. 그런 걸 보기에는 꽤 어렸던 거 같은데 그때 그 인트로가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정말 열렬한 팬이었나 보다.


아직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한 전업주부가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갖게 되는 스토리였는데, 그녀는 산만한 아이들, 매일 일을 시키는 남편, 얄미운 이웃 등과 갈등이 생길 때마다 시간을 멈추어 위기를 모면한다.


즐거운 일상을 맞이하는 듯했지만 어느 날 구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하게 되고, 뉴스를 본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다시 멈추어버린다.


모두가 멈춘 세계에 그녀는 홀로 남았다. 시간을 다시 돌리면 모두의 죽음이고 멈춘 상태로는 세상에 홀로 남겨져버린 모순에 봉착한다.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여자의 마지막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정보라의 책 저주토끼는 나에게 환상특급의 현대판 같았다.


https://youtu.be/0P17udA4N9U?si=cje77EVdwowKyGOl


나는 소설에 약하다. 그리고 한국 소설은 아는 게 별로 없다.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내 셀렉션이 안 좋았을 수도 있지만, 어렸을 적 읽은 한국소설은 대부분이 애국심, 가족애,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혹은 정치사였다. 그런 주제들은 나에게는 소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감정적이거나 무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보통 내 우선순위는 논픽션인 데다가 성인이 된 후 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올해 서울에 이케아가 생겼다고 해서 잠시 들렀다가 그 건물에 서점이 있는 걸 발견했다. 서점에 카페까지 붙어있어 책 보기에 매우 좋은 장소처럼 보였다. 요새는 어딜 가나 인테리어도 매우 깔끔하다.


최근 꽤 두꺼운 논픽션을 읽고 있기 때문에 좀 말랑말랑해 보이는 소설을 살펴보다가 저주토끼를 발견했다.


죄송스럽게도 꽤 유명한 것 같은 이 작가를 나는 전혀 모른다. 그저 표지디자인이 맘에 들어 집어 든 것이 사실이다. 단편집을 모아놓은 데다가 10만 부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의 하드커버가 세련되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구매를 결정했다. 나는 책을 사치스럽게 산다.


그리고 그날 밤 잠자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다가 순식간에 책의 반을 읽어버렸다.


가끔 너무 재미있는 책이나 만화를 볼 때 눈이 먼저 글을 쫒으려고 할 때가 있다. 의미파악도 다 못했는데 꼭 다음 글자를 지금 보지 못하면 영영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모양새다.


저주토끼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읽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환상특급의 열렬한 팬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복수"를 부제로 한 한국판 환상특급이다. 한국인이 썼다고 하기에는 뭔가 모르게 이국적이기도 하다. 아마도 작가의 유학생활이 투영됐으리라.


환상특급을 볼 때처럼 이 상황에서 나라면 어땠을까? 어떤 선택이 더 정의로운 것인가? 내가 주인공으라면 복수를 하고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온갖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순되는 정의와 인간의 욕망을 풀어나가며 글의 무드는 현실적이기도 판타지이기도 Sci-fi이기도 하다. 단락 단락의 빈 공간이 안 느껴지게 밀도 높은 묘사로 냉혹하고 철학적인 이 복수극을 담담하게 써내려 갔음에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잔인하고 악에 받쳐있다기보다는 담담하고 여운이 남게 감정에 적당한 거리감을 두었다.


저주토끼라는 단편을 제목으로 내세웠지만 나는 후반부의 단편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


흉터라는 이야기는 한 소년의 희생으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게 된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로 주인공의 선한 의도가 복수로 이어지게 되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다.


한 명의 희생으로 다수가 평안하면 그것은 정의인가?라는 질문은 항상 되새김이 되는 소재이지만, 이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던 부분은 따로 있다. 소년은 자신이 사랑하게 된 소녀를 위해서 괴물을 없애러 끔찍한 장소로 되돌아가 성공했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소녀는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가 그나마 익숙했던 마을도 사라져 버렸다. 결국 괴물조차도 복수에 성공한 것인가?


복수에 성공했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후 소년도 행복을 얻진 못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눈물이 멈추었을 때,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그는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재회라는 마지막 단편은 트라우마, 용서, 사랑, 도피 등 인간의 존재 전반을 아우르는 이야기이다.


전쟁에 희생당한 할아버지, 아들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머니의 학대, 가족의 빚을 짊어지게 된 주인공 그리고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들과 사람이었던 것들... 서로의 상처를 바라볼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어긋난 타이밍... 하지만 주인공은 결국 연인을 구원해 내고 자신도 구원자를 기다리게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 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나는 소설에 문외한이지만 짧은 글에 철학적 내용을 모두 함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계적인 설정을 적절한 단어로 치밀하게 풀어내야 가능할 것 같은데 그 바탕에는 당연히 단단한 세계관이 받쳐줘야 한다.


모든 단편소설이 몰입하는 즐거움을 주었다.

이 책이 정보라의 환상특급으로 각색되어 넷플릭스에서 보게 되면 어떨까 상상하며 나는 작가의 다른 책을 또 사치스럽게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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