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도 여행이 된다

by 연필

들어가는 말

"AI가 대신 글을 써주는 시대에 내가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일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처음에는 '나의 생각과 경험은 오롯이 내 힘으로만 쓸 수 있으니까'라고 답하려 했다. 그조차도 이전 대화 기록을 보고 나인 것처럼 기가 막히게 써주는 AI 기술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AI가 발달하더라도 사람이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무리 AI가 공들여 준 완벽한 정답이라도 내가 직접 곱씹어서 이해를 해야 한다. 이해를 잘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정리하는 스킬이 필요하고, 그 스킬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직접 글을 쓰는 것이다.


이 생각이 언제 또 바뀔지는 모르지만,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쓴다.


일상도 여행이 된다.

예전에 내가 '보헤미안'인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20대 후반에 미국 자전거 여행을 간 이력 때문에 나도,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훌쩍 떠나는 사람도,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안정된 일상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다.


오히려 묵묵히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처럼 변함없는 루틴을 반복하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데 충족감을 느끼는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단조로움과 권태로움은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온다. 그럴 때 남들은 여행이나 이직과 같은 일탈을 하는데, 나는 그런 데에서는 만족감을 그다지 느끼지는 못 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일상 속 여행'이다. 몇 시간을 그냥 걷는다. 목적도, 방식도, 동행도 없다. 발걸음 내키는 대로 그냥 걷는다. 대중교통도 타지 않고 오로지 내 다리에만 의존하는 걷기 여행이다.


이번에는 천호역에서 시작했다. 강동구청 쪽을 향해 걷는데 카페 하나가 눈에 띈다. 하나도 달지 않은, 따뜻한 차 하나를 시킨다. 마음을 비우는 여행에서는 이렇게 담담한 차가 어울린다. 저 앞에 신호등이 켜졌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달리면 건널 수 있지만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빨간불로 바뀔 때쯤 도착한다. 인위적으로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순리에 맡긴다.


잠실 방향으로 걷다가 왼쪽에 올림픽 공원이 보여서 마음이 동한다. 샛길을 통해 공원에 들어서서 흙길을 밟았다. 한 바퀴를 돌고 공원 정문으로 나와 또 하릴없이 앞으로 걷는다. 걷기 초반에는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랐다. 평소 급하게 일하던 관성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걸으면서 몸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진다. 느림의 미학을 체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일상 속의 걷기 여행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어느덧 방이시장까지 왔다. 목적한 바는 아니었으나, 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부지런한 시장 상인들. 뭔가를 사는 사람들. 시장 음식을 먹는 사람들. 호떡 가게 하나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어서 나도 줄을 서서 하나 먹어본다. 서두를 이유가 없으니 옆에서 천천히 다 먹고 자리를 떴다.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 누가 채근하지는 않지만 이만하면 됐다. 한 번에 오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나 자주 하느냐가 중요하다. 밥솥에 꽉 찬 김을 그대로 두지 않고 한 번씩 빼주듯이 말이다. 한 달 후 다시 '훌쩍 걷기'를 하기로 다짐하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202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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