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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Oct 12. 2021

서울 로망

육지왕 살암수다(1)

  

서울 로망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되었다. 아빠는 허리가 안 좋으셔서 가끔 서울에 있는 병원에 다녀오시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남대문에서 우리 4남매의 옷을 사다 주셨다. 그런데 허리가 안 좋으셨던 분이 그게 가능했을까? 허리가 아니고 다른 곳이 안 좋으셨나?


   선물 받았던 옷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은 빨간 원피스가 있다. 허리 위쪽으로 빨강과 하양 스트라이프 무늬가 있었고 아래쪽은 빨간색 치마였다. 그리고 빨간 머리띠와 빨간 쫄쪼리 고리바지까지 셋업이었다.


  그 옷을 입고 등교를 하는 날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올 빨강이었다. 빨갛고 조그만 아이가 등교하는 모습을 보며 남들은 어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코피 퐝! 터질 것 같은 정열의 그 빨강 옷이 좋았다. 이것이 바로 서울 냄새나는 서울 사람들이 입는 세련되고 멋진 옷이지. 머리끝부터 바지의 고리가 걸리는 발바닥까지 강렬한 빨간색과 부드러운 촉감, 세련된 디자인이 2학년 꼬마에게 서울은 무지하게 세련된 곳, 멋진 곳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그 후에도 TV 편성표를 보고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프로그램이 예고도 없이 훅 지역방송으로 대체되거나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전시회나 음악회의 광고 자막을 볼 때마다 문화를 누리는 즐거움에서 당연히 내가 제외되는 것이 서운하고 싫었다.


  그리하여 중고등 학교를 거치며 나의 목표는 ‘서울에서 살기’가 되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가장 빠르게 서울에서 가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그 목표로 나는 성실하지 않을 때를 빼고 나름 성실한 중고등학생 시기를 보냈다.     



  

  나는 불운한 98학번이다.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에 뉴스마다 회사에서 갑자기 해고당한 사람들, 기업이 부도나서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온 국민이 불안에 떨었던 시기였고 그런 소식들을 들으며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마음에 품었던 인서울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때 이미 언니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긴 했지만 나까지 서울로 보내기엔 더 들어가야 할 학비며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다.  “IMF인가 뭔가로 살기가 어려워진다니 대학은 제주도에서 다니고 임용시험은 서울에 가서 보라”는 아빠의 담보 없는 말 한마디에  “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서울 탐사선은 카운트다운도 못 해보고 4년 후 발사를 기약해야 했다.


  가끔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본다. 제주에서 교육대학을 다니는 동안 제주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은 그리지 않았다. 미래의 나의 소울(soul)은 항상 서울(Seoul)에 있었다. 칠판 앞에 서 있는 나는 항상 서울의 어느 학교에 있었다.


  임용고사 원서는 당연히 제주가 아닌 서울로 제출했고 부모님은 뒤늦게 4년 전 나를 달래려 했던 말을 떠올리며 후회하셨다. 가까이에서 자식들을 자주 보며 지내고 싶으신 마음도 있으셨을 것이고, 자식이 그렇게 바라던 꿈을 이루길 바라는 마음도 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서울로 원서를 제출한 후에 통보를 했던 거라 부모님 앞에 놓인 선택지에는 딸을 서울에서 시험을 보게 하는 것과 시험을 보지 않게 하는 것밖에 없었다. 원서 제출 전에 말씀드렸다면 예쁜(?) 딸을 육지로 보내기 아쉬워하시는 부모님께 또  “네~”라고 대답했을지 몰랐다.


  아 그런데~ 그런데~ 막상 내 맘대로 서울로 원서를 제출하긴 했지만 합격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울 탐사선이 발사 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중에서 ‘푸아악~’ 폭발해버리지는 않을까. 그런 불안한 마음은  “떨어지면 재수하면 되지”라는 아빠의 말 한마디에  ‘그래 뭐 1년 더 공부하면 되지. 별거 아니지.'로 바뀌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의 인생 마디마디에 아빠의 말 한마디가 큰 역할을 했었다.      



  

  4남매의 로망이 비슷했던 것일까? 내가 서울에 발령을 받는 것을 마지막으로 4남매 모두 육지에 나와 터를 잡게 되었다. 2002년 나는 처음으로 서울의 벚꽃도 보았고, 정말 태권 V가 출동할 것 같은 국회의사당도 보았고, 한강 야경도 보았고, 서울시청 앞에서 월드컵 경기 응원도 해보았다. 다이내믹 서울!! 알럽 서울!! 잊지 못할 2002년에 나는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었고 제주도민에서 서울시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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