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봄 Oct 12. 2021

친애하는 나의 제주 집에게

육지왕 살암수다(2)

 제주도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날 때 지어졌다. 1980년 1월에 엄마는 셋째 딸을 낳았고, 2월에 집 공사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우리 집과 내가 나이가 같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확히 공사를 언제 시작했는지는 몰라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1월에 나를 낳은 엄마가 2월부터 집을 지으셨다고 한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엄마가 눈치 보지 않고 몸을 더 회복한 후 공사를 조금 천천히 시작할 수 있으셨을까?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그때 우리 집은 1년에 제사가 8번이나 있었다. 제사 8번에 추석, 설 명절까지 도대체 우리 엄마는 그 많은 일을 하시면서 자식을 어찌 4명이나 낳고 기르셨을까? 결혼을 하고 나서야 시할머니까지 모셔야 된다는 걸 아셨다고 하셨다. 엄마에게 그렇게 힘든 집에 왜 시집을 왔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빠가 좋아서’라고 대답을 하셨다. 젊은 시절 아빠 사진을 보면 아주 조금 그럴 수 있다 싶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이겨낼 만큼 외모가 심하게 빼어난 건 아니다. 뭐 내가 모르는 아빠의 다른 매력이 분명히 있으셨을 거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지어진 집은 섬의 거센 비와 바람 속에서도 40년이 넘는 세월을 꿋꿋하게 잘 버텨주었다. 살면서 한 번씩 욕실, 화장실, 지붕, 문, 창문 등 집 안팎으로 꾸준히 리모델링도 했고 아빠의 성격이 꼼꼼하셔서 잘 관리해오신 덕분이다.



 

 작년 아빠는 갑자기 정말 빠른 시간 사이에 건강이 나빠지셨고, 거동이 힘들어지셨다. 제주 병원에서 검사를 했고 상태가 심각하다는 결과를 들으셨다.


 아빠는 원하지 않으셨지만, 오진일 수 있으니 서울에서 검사라도 다시 받아보자는 자식들의 말에 서울로 오셨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챙겨 왔던 검사 결과 자료는 너무 분명하게 췌장암 말기를 가리키고 있었고, 조직검사를 하는 것조차 위험할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아빠는 다 알고 왔다고 괜찮다고 하셨다.


  아빠는 마음 굳게 먹으라는 말씀을 하시며 다시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그 비행기를 타고 큰언니와 남동생이 같이 제주도로 갔다. 입원하실 병원을 알아보는 일과 엄마가 혼자 처리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일들을 챙겨야 했다. 그런데 그동안은 편하게 지내셨던 집인데 아빠가 갑자기 거동이 힘들어지면서 여러 불편한 점들이 언니의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 제일 불편했던 것은 욕실이었다. 욕실을 최근에 리모델링하면서 부모님께서 야심 차게 사 넣으신 욕조는 매립형이 아니라서 너무 높았다. 아빠가 혼자서는 욕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엄마와 언니가 옆에서 부축을 해 드려도 힘들었다.


  아빠는 집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신 후 병원에 입원하셨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병원에 입원하셨지만 조금 호전되면 퇴원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조금은 더 있을 거라고, 쇠소깍 바다도 함께 걸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주말에 입원하신 아빠를 보러 제주도에 다녀가면서 "아빠, 다음에 또 오쿠다예(올게요)~"하며 병원을 나왔지만 그게 아빠와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아빠의 생명 보험금은 그동안 우리 4남매가 납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그 보험금을 본인이 받지 않으신다고, 우리가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1년이 지났고 우리는 아빠의 보험금을 욕실과 부엌 리모델링에 사용하기로 했다. 혼자 사시는, 이제 70이 넘으신 엄마가 더 안전하고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집을 고쳐드리기로 했다. 70세 노인이 혼자 산다고 혹시 인테리어 상담과 공사 때 함부로 하거나 대충 마무리가 될까 하는 걱정으로 우리는 주말에 제주도를 번갈아 가며 다녀왔다.


  그 공사가 9월 초에 끝났다. 언니 둘과 나는 엄마를 위해서 이케아에서 욕실, 부엌 용품들을 샀고 작은 언니가 그 물건들을 싸들고 제주도로 갔다. 작은 언니는 정리의 신답게 사간 이케아 물건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사진을 찍어 보냈다. 이것으로 엄마를 위한 안전하고 예쁜 인테리어가 완성되었다.




  혼자되신 엄마가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셨는데 동네 어르신께서 “혼자 사는 사름이 뭐 살꺼 이성 와시냐?(혼자 사는 사람이 뭐 살게 있어서 왔냐?)”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엄마가 속상해하신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 신경 쓰지 마시라고, 그분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분명 후회하셨을 거라고 위로는 해드렸다. 하지만 시골 노인들이 뒤에서 남의 집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들을 하실지 모르지 않았다. 남의 집 사정을 너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래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상처 받는다. 조금 더 예의를 갖추고 따뜻한 인사를 건낼 수도 있을 텐데...... 


 집 인테리어를 하면서도 누군가 이 일을 함부로 쉽게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멀리 살고 있어서 그 말들을 직접 들을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엄마에게 ‘남편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집을 뜯어고치냐고, 그 돈은 어디서 나온 거냐고, 자식들이 같이 살지도 않는데 왜 집을 뜯어고치냐고...’그런 말들을 할까 봐 신경 쓰이고 걱정된다. 주변에 그런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말들은 시골에서 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육지에 살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가까이 옆에 있는 사람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될 때가 많지만, 큰 상처도 그 사람들에게 받는다. 아름다운 내 고향 제주도가 좋다. 하지만 제주도의 오래된 거친면들을 감당하는 것이 그곳이 삶인 사람에게 쉽지만은 않다.





* 이 글과 제목은 하재영 작가님《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 로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