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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Oct 12. 2021

때때로 지각

육지왕 살암수다(3)

  

 

  약속 시간에 촉박하게 가는 걸 싫어한다. 시간에 빠듯하게 도착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그때부터 심장이 쫄깃해지며 시계를 계속 체크하게 된다. 난 더위도 많이 타고 땀도 많이 흘리는 체질이다. 약속 장소까지 가는데 빠르게 걷거나 뛰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겨터파크를 시작으로 온몸의 파크들이 너도 나도 퐝! 하고 존재감을 흠뻑 드러낼 것이다. 나름 공들여 화장한 얼굴도 땀에 절어 번들번들 해진다. 그런 게 싫다. 마음과 육체가 여유롭지 못한 게 불편해 약속시간에 늦는 걸 싫어한다.

  출근할 때도 지각하는 건 딱 질색이다. 늦게 부랴부랴 교실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선생님 없는 교실에서 신난다고 시끌시끌 떠들고 있을 것이다. 교실의 주도권을 아이들에게 뺏긴 채로, 한숨 돌리기가 무섭게 1교시를 시작하는 건 너무 정신없다. 영혼이 막 가출하는 느낌이다. 스위치를 '딸깍'하고 켜는 것처럼 출근 모드에서 수업 모드로 '딸깍'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일찌감치 교실에 들어가 책상도 한번 닦고, 커피를 내리고 잠깐 책도 읽고 필사도 한다. 고요하고 여유롭게 시간과 공간을 컨트롤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좋다. 내가 딱 책상에 앉아 있으면 등교하는 학생들도 분위기라는 걸 조금 파악하면서 조용히 1교시를 준비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손이 교실 분위기를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학생들이 10명 이상 등교하면 곧 주도권은 그들에게 넘어가지만 흥분지수 0에서 시작한 하루와 50 언저리에서 시작한 하루는 분명 다른 뭔가가 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할 때는 나만 신경 쓰고 노력하면 특별한 일이 없고서는 지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남으로 막 이사를 왔을 때는 지하철이 개통되지 않았었다. 근무지였던 금호동까지는 차로 출퇴근을 해야 했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지각의 기억들은 거의 올림픽대로에 있다. 처음 올림픽대로를 운전할 때는 '한강을 끼고 달리는 것! 이것이 바로 육지 라이프다'라며 스스로 막 멋져 보였고, 57분 라디오 교통방송에 올림픽대로가 나오면 '내가 바로 거기 있다~!'며 감동하고 그랬었다. 그런 감동과 로망은 꽉 막인 출근길에서는 날 위로하지 못한다. 도로 위에서는 나 혼자 신경 쓰고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도대체 월요일마다 왜 차는 이렇게 막히는가? 정말 이건 팩트다. 올림픽대로가 막히지 않는 월요일은 없다. 월요일은 온 우주가 깨어나 차를 몰고 집 밖으로 나오는 날이다. 학교까지 대략 1시간 30분 정도 예상하고 아침에 출발하면 월요일을 제외한 보통의 날에는 일찍 도착해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출발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도착시간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10분 늦게 출발하면 10분 늦게 도착하는 단순한 산수 문제가 아니었다. 올림픽대로는 그런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2018년 5월 3일 서울 하늘에서 갑자기 우박이 막 쏟아졌던 그날은 우리 학교 어린이날 기념 운동회날이었다. 행사가 있는 날은 아침부터 챙겨야 할 것도 많고 학생들은 신나고 들떠있어 정신이 없다. 일찍 출근해서 차분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시작부터 힘든 하루를 보내야 한다. 내 손안에 딱 들어오지 않는 어수선한 분위기는 하루가 끝날 때까지 가는 것 같다.


  아 그런데 그런 중요한 날, 월요일도 아닌 날에 이상하게 올림픽도로가 꽉 막혔다. 도대체 맨 앞차는 왜 집에 안 들어가고 길에 서 있는 걸까... 도대체 길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정말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정체였다. 꼼짝 못 하고 앞 차 뒤 범퍼만 쳐다보는데 라디오에서 소식이 들렸다. 트럭에 싣고 가던 쇠파이프가 올림픽대로 어딘가에 와르르 떨어져 수습 중이라고. 교통방송에 감정은 없다. 사람이 다쳤을 수도, 트럭 근처에 가고 있던 차들에 피해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아무 생각 없이 트럭 기사와 쇠파이프를 원망할 수 있다.


  어쨌든 9시 운동회 시작 전에 학교에 가기는 글렀다. 동학년 카톡방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우리 반 학생들을 부탁했다. 감사하게도 옆 반 선생님께서 우리 반 학생들까지 챙겨 우유도 먹여주시고 운동장까지 잘 데리고 나가주셨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준비 체조를 하고 있었다. 학부모님들과 교장, 교감 선생님의 눈을 피해 아주 조심스럽고, 자연스럽게, 마치 교실에 뭘 가지러 잠깐 다녀온 것처럼 체조를 하며 우리 반 학생들 뒤로 걸어갔다. 그날은 운동회 중에 갑자기 우박이 쏟아져 오후 일정은 모두 취소되었었다. 쇠파이프도, 우박도 잊을 수 없는, 흔하지 않은 날이다.


  금호동으로 출근하는 마지막 날도 지각이었다. 새로 발령을 받은 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강동이라 더 이상 막히는 올림픽대로로 출근을 할 일은 없겠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하지만 올림픽대로는 마지막 날이라고 봐주는 게 없다. 그동안 고생했고 미안했다며 뻥 뚫어줘도 될 것 같은데 무지막지한 놈. 2월 중순 그날 눈이 너무 많이 왔고, 1교시 시작 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없었다. 전근 가는 선생님들 중 짬밥에서 가장 밀리는 내가 1교시 종업식 때 대표 인사를 하기로 했는데 큰일이었다. 교무실로 전화해 교무부장님께 도저히 차가 막혀 종업식 시간에 맞춰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대표 인사는 못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괜찮아~ 아직 교장 선생님도 출근 못 하셨어. 맘 편히 와~” 그러셨다. 그 시간 교장 선생님도 올림픽대로 어딘가에 계셨다.




  지금 가끔 올림픽대로를 운전하다 보면 그때 애증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지각하고 정신없는 건 싫었지만 계절 따라 달라지는 길가의 나무들은 좋았다. 아기새들이 나는 연습을 하며 도로의 왼쪽 나무에서 오른쪽 나무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새가 나는 법을 익히기까지 수없이 연습하는 모습을 본떠 만든 한자 ‘습(習)’의 현장이었다. 그날은 학생들에게 '학습'이라는 단어를 다시 설명했다. 열심히 배우고 그다음엔 꼭 스스로 익혀야 한다고 올림픽대로의 생생한 장면과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출퇴근길 차 안에서 듣는 신나는 라디오도 좋았다. 비 오는 월요일에 나온다는 (얄미운) 교육청 복무 감사에는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다. 참 운이 좋다. 그래도 다시는 올림픽대로를 타고 그렇게 출근하고 싶지는 않다.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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