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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Oct 13. 2021

나 집에 갔다 올게

육지왕 살암수다(4)


  아침부터 마음이 급하고 심장이 쿵쾅 거린다. 1시 35분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간다. 집에 가는 날은 항상 설레고 긴장된다. 2박 3일 내가 없어도 최대한 집구석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집안 정리, 빨래, 설거지를 깔끔하게 해 두고 음식 쓰레기를 버리고 온다. 미션 클리어!


  집 정리가 끝나면 씻고 화장을 한다. 화장은 공들여서. 어쩌면 그곳에서 몇 년 만에 친구를, 아는 사람을 더 운이 좋으면 학창 시절 첫사랑을 마주칠 수 있으니. 가까이 살며 자주 얼굴을 보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는 내가 서서히 살찌거나 나이가 들어 조금씩 얼굴이 쳐져도 자연스럽게 보일 거다.


  그런데 오랜만에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 그들의 눈에서 '에고... 많이 늙었구나'라는 감출 수 없는 메시지를 읽게 될까 두렵다. 화장을 떡칠해도 딱히 가릴 수 있는 주름과 잡티는 아니지만 똥 손으로 최선을 다해 숨겨본다. '주름이 생기는 게 자연스럽고 얼굴이 쳐지는 게 당연한 나이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조금만 더 예쁘게는 안 되겠니?' 하며 팡팡 두들겨 본다. 좁은 서귀포에서 그동안 첫사랑을 우연히 마주친 경험이 한 번도 없으니 난 운이 정말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다.





   작년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는 엄마가 쓸쓸하게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제사 준비를 하실게 마음이 쓰인다. 두 분의 제사를 합쳐서 지내 제사 횟수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올해는 내가 쉬고 있으니 집에 가서 엄마를 도울 생각이다. 학교는 어떡하냐는 엄마에게 방학을 일찍 했다고 거짓말한다. 엄마는 내가 질병휴직 중인걸 모르신다.


  작년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해였다. 3월 췌장암 진단을 받으신 아빠는 딱 한 달 후 세상을 떠나셨다. 3월 이후 주말마다 번갈아가며 자식 4명이 제주도를 방문했고 나는 주어진 시간이 조금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건 엄마와 이모였다. 마지막 가시는 아빠 옆에 우리 자식들은 아무도 함께하지 못했다.


  육지에 나와 살면서 막연하게 걱정했던 일이다. 자식들 4남매가 모두 육지에 나와 살고 있는데 부모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 그럴 것 같아 두려워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해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작년 4월 그렇게 아빠를 보내드리고, 11월에 나는 임파선 전이가 된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2021년 올해 1월에 갑상선과 임파선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고 그 후 질병휴직 중이다. 제주도에 혼자 계시는 엄마에게는 내가 수술을 받았고 휴직 중이라는 이야기를 차마 할 수 없었다. 섬 바람에 유리창이 덜컹거리는 안방에 혼자 누워, 날 걱정하며 한숨 쉬고 계실 엄마를 떠올리는 건 아픈 일이다.  

 




  해야 할 거짓말과 숨겨야 할 것들이 늘어나지만 우리 엄마가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내셨으면 한다. 이젠 다른 사람 챙기지 말고 엄마가 하고 싶으신 것만 하면서 하하 웃으면서 사셨으면 한다. 좀 늦었지만 그래도 엄마를 위해서만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시길. 새로 산 초커 목걸이로 흉터를 싹 가리고 씩씩하게 집을 나선다. 나 집에 갔다 올게~




2021년 7월 18일에 쓴 글을 수정하여 올렸습니다.


"나 집에 갔다 올게~" 이 문장은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유*님의 "나 집에 갔다 올게~" 하며 제주도로 가는 것이 부럽다는 내용의 댓글에서 따왔습니다. 유*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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