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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Oct 16. 2021

바떠레 가는 길(밭으로 가는 길)

육지왕 살암수다( 7 )


  제주도 집에 왔다.


  미깡 밭에 안 가신다던 엄마가 아침 일찍 일어나셨다. 잠깐 가서 제초제만 뿌리고 온다고 하신다. "너랑 집에 이시라. (넌 집에 있어라)"하신다. 그냥 있으라고 하지만 내가 따라나서면 더 좋아하실 걸 안다. 밭에 나가는 길 아침 공기가 좋다. 이른 아침 도로에는 렌터카보다 미깡 밭으로 나가는 트럭들이 더 많다.


  




  제초제는 미깡 밭에 있는 검질(잡초)을 제거해주는 농약이다. 제초제도 정성껏 뿌려줘야 한다. 화초에 물 주듯 꼼꼼하게 뿌려준다. 화초에 물을 줄 때와 다른 건 마음의 소리다. '잘 먹고 쑥쑥 자라~'가 아니고 '미안하지만 잘 먹고, 넌 이제 사라져 줘야겠어.' 하는 마음이다.


  검질은 종류가 다양하다. 민들레(너를 잡초라 불러서 미안하구나), 쇠비름, 더 있는데 다른 건 이름을 잘 모른다. 검질 중에 최고 검질은 바랭이 풀이다. 바랭이는 벼처럼 생겼다. 바랭이가 검질 중에 최고 검질인 이유는 제초제를 뿌려도 끄떡하지 않고, 번식력이 엄청나서 금세 주변으로 퍼지기 때문이다. 화성에 갖다 놔도 잘 살 것 같은 아이다.


  바랭이는 내 손으로 뽑아준다. 확실하게! 왼손으로 그 녀석을 움켜쥐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살짝 비튼다. 오른손으로는 "나와라 가제트 만능 호미!"를 외치며 뿌리 근처를 깊게 푹 찌르고 확 당긴다. 한 번에 뽑히는 것들은 아기 바랭이이거나, 조금 기가 죽은 녀석들이다.


  웬만해서는 한 번 호미질로 뽑혀 나오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왼손을 다시 쥐어 잡고 오른손 호미 끝에 기를 모아서 잡아당긴다. 힘이 어찌나 센지 쑥 뽑혀 나오며 같이 엉덩방아를 찧을 때도 많다. 뽑혀 나온 바랭이는 뿌리로 흙을 잔뜩 쥐어 잡고 있다. "우리 밭 흙은 한 줌도 허락할 수 없다" 탁탁 흙을 털어내고 마대 자루에 담는다. 뜬금없이 친일파가 떠오르기도 한다. 말끔하게 청산해주겠어! 이렇게 골칫덩이 바랭이만 뽑아줘도 엄마가 제초제를 뿌리는 일손을 많이 덜어드릴 수 있다.



흙을 잔뜩 움켜 쥐고 있는 바랭이 뿌리


흙을 털어 냈다.


  바랭이를 뽑고 있는데 "보미야~"하는 소리가 밭에 울려 퍼진다. 반가운 소리다. 제초제 살포기 배터리를 충전하는 동안 엄마와 믹스 커피를 한 잔 한다.  






  11월부터는 미깡을 딴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난 부모님을 도와 미깡을 땄다. 해가 뜨기 전에 집에서 출발해야 하니 주말엔 등교할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옷을 꽁꽁 껴입고 가도 11월의 새벽은 너무 춥다.


  밭에 도착해 차가운 흙을 밟으면 한 발짝 내딛으면서도 ‘나의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뇌에 빠진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 발, 한 발, 주저주저하고 있으면 아빠가 밭 입구에 있는 커다란 드럼통에 불을 지펴주신다. 아빠가 멋져 보이는 흔치 않은 순간이다. 드럼통 옆에서 몸을 녹이고 있으면, 이 달콤한 순간이 여기서 딱 멈췄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해진다.  


  벌써 멀리서 '착착' 미깡 가위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엄마가 먼저 자리를 잡고 일을 시작하셨다.  " '착착' 불 조꼬띠 더 있당 와도 된다게! (불 옆에 더 있다 와도 돼!) '착착!' 엄마 먼저 햄시마! (엄마 먼저 하고 있을게!)"라고 말씀하시지만 미안한 마음에 불 앞에 더 있을 수 없다.


  미깡을 따다 보면 추웠던 몸이 금세 녹는다. ‘삶은 어디로 가는가’하는 잡생각도 어느새 녹아 없어진다. 빨리 이 미깡 잘리(바구니)를 채워야겠다는 생각뿐.


   미깡 밭에서 제일 반가운 소리는 “보미야~! 왕 (와서) 점심 먹으라!”와 “보미야~! 이제 집이 가게. 어둑엄쩌. (집에 가자. 어두워진다.)”다. 하루를 온전히 노동 채우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깨가 으쓱했다. 나도 우리 집을 위해 눈에 보이는 업적을 한 숟가락 얹었다는 느낌이 있었다. 저녁에 부모님과 ‘아이고 허리야, 팔다리야’ 소리를 같이 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다.

  





  요즘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쓰고 나면 미깡 밭에서 종일 미깡을 딴 것처럼, 검질을 맨 것처럼 혼자 어깨가 으쓱하다. 감히 내가 글이란 것을 쓴다고 해도 될까 싶지만, 앞으로 내가 쓰는 글이 좋은 사람의 향기가 나는 글이면 좋겠다. 좋은 글을 쓰는 좋은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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