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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Dec 10. 2021

결승선까지 바로 가는 서비스

  난 운동 신경이 없는 사람이다. 못하는 운동 중에 최고로 못하는 건 달리기다. 초등학교 때 달리기 시합에서 나와 같은 조에 배정된 친구들은 몸 바쳐 바닥을 깔아주는 아이가 있으니 경기에서 꼴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나름대로 누구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은 편했다. 물론 욕심을 내려놓고 순위 경쟁에서 한 발 물러서 너희들만의 리그를 인정하기 까지가 쉬운 건 아니었지만.

  

  잘 달리는 친구들을 유심히 관찰해본 적이 있었다. 그 친구들은 발도 빨랐지만 팔도 앞뒤로 빠르고 세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거였다. 그런데 나는 팔마저 빠르게 휘두르는 게 힘든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왜 이렇게 운동을 못 하는 걸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 너무 우울했다. 안되면 깔끔하게 포기하라.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운동’에서는 욕심을 버리고 양보하는 무소유의 인간이 되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에서 딱 한 번 1등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 찾기>였다. ‘모자 쓴 사람’, ‘검정 운동화 신은 사람’. 이렇게 쪽지에 쓰인 사람을 찾아 결승까지 손을 잡고 달리는 경기다. 내 쪽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구경하는 인파 속에서 갑자기 엄마가 튀어나왔고, 무조건 내 손을 잡고 내달렸다. 운동회 때마다 꼴찌로 열심히 달리는 딸이 불쌍해 보여서 그러셨는지 그날 엄마는 무지 빨랐다. 난 발이 땅에 닿을 새도 없이 거의 날아갔다. 그렇게 엄마와 달려 결승에 도착한 것이 달리기에서 유일한 1등의 기억이다. 엄마는 초등학교 때 계주 대표였다고 하셨다. 내 운동 신경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할머니 손 잡고 날아가는 엄마 (그림 출처. 굳이 엄마의 글에 도움이 되고 싶은 예쁜 아이)



  달리기에서 엄마 손을 잡고 훌쩍 날아 결승선에 도착한 것처럼 내가 세상 물정 모르고 헤매고 있을 때 어떤 초월적 존재가 인형 뽑기 기계처럼 내 목덜미를 잡고 훌쩍 깨달음으로 이끌 때가 있다.      


  대학원 1년을 마치며 가진 식사 자리에서 다들 소감을 이야기해보라고 하셨다. 물론 그런 말은 그 자리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주로 하는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 권력자 옆자리에 내가 앉아있었다. 미친 대학원생처럼 “난, 패스!”를 외칠 수 있는 분위기는 당연히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라도 해 갈 것을. 난 순발력도 떨어지면서 준비성도 없었다. 첫 순서라 더 당황했고, 어디서 들어봤음 직한 이야기가 뇌를 거치지도 않고 발화되었다. 그 권력자는 “틀에 박힌 이야기, 상투적인 말”이라며 내 말을 딱 잘랐다. 진심으로 쪽팔렸다. '말을 끝까지 들어 보지도 않고, 너무 하시네~. 시작은 상투적이지만 뒷부분은 멋지게 잘 마무리했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그럴 일은 없었을 것 같다)'라며 그 권력자를 한동안 티 나지 않게, 소심하게 미워했다.       


  교수님께 받은 굴욕으로 자존심이 상해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의 마음가짐에 긍정적 변화가 생겼다. 진심으로 말하기. 어떤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던지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속 빈 쭉정이 같은 말은 빼고 나만 할 수 있는 말, 소박하고 촌스럽더라도 진심을 담은 말을 해야 한다. 무슨 말을 하려면 항상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상투적인 말이었고, 그런 말을 지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결승선까지 훌쩍 데려다준 엄마의 손 없이 또다시 달리기에서 1등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교수님의 따끔한 지적은 내가 진실을 말하는 세상에서 계속 살게 해 주었다.


  또 하나, 내가 함께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는, 미친 자가 아니라도 “패스!”를 편하게 외칠 수 있는 분위기를 먼저 만들 것. 강강술래도 아닌데 모두 다 돌아가며 한 명씩 빠짐없이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은 종종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한 번 말해봐, 니 생각을 내가 알아야겠어’라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난 더더욱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사람이다. ‘권위적인 당신에게 내 생각을 들키지 않겠어.’라는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 능력 발현일지도. 부루마블의 ‘무인도 탈출’ 황금 열쇠 같은 매직, “패스”가 허용되는 분위기라면 그때 웃으며 말한다.

 “우리 다 같이 이야기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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