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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Nov 24. 2021

고3!  그들이 돌아왔다.


  낙엽 가득한 쓸쓸했던 거리에 생기가 돈다. 봉인 풀린 고3이 돌아왔다. 여전히 검정 롱 패딩을 걸치고 있지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암흑의 기운만은 탈탈 털어내고 가벼운 발걸음의 그들이 한낮의 도로를 점령했다. 대견한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뭉클하다.


  수능을 치른 조카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기운 넘치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너무 좋아 ‘시험 잘 봤어?’라는 말은 집어치웠다. 내가 그걸 묻는다고 뭣이 달라지겠어? 전화를 끊고 나서 굳이 물어도 그만, 안 물어도 그만인 말은 안 묻길 잘했다며 혼자 뿌듯하다.





  1997년 11월 내가 수능 시험을 치렀던 먼 옛날, 마지막 외국어 영역 시험이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뭐지? 겨우 이게 끝이라고? 난 아직 전투를 치를 힘이 더 남았는데 이대로 가라고? 겨우(?) 하루 요만큼 시험 보고 끝인걸 내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두들겨 맞은 것처럼 너덜너덜 기진맥진하게, 사지에 힘이 다 풀려 벌벌 기어서 교실을 나가도록 그렇게 가혹한 날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정도는 되어야 그간 내가 보낸 힘든 시간과 수능 시험이 동일한 값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실을 나가면서 허무함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시험날 하루의 비장했던 허무함은 곧 잊혔다. 그 후의 시간을 뭘하며 보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어영부영 흘려보냈던 것 같다. 멋 부린다며 그때 유행하던 브릿지 염색을 해서 졸업식날 다신 눈뜨고 볼 수 없는 굴욕의 사진을 찍은 기억은 있다. 내가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촌스러운 염색은 섣불리 하지 않으리.


  2022학년도 수능 국어 영역 1번 지문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런던의 한 건물 사진이 실렸다. 폐허가 된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갑작스럽게 닥친 전쟁의 상황에서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의 내면과 세계가 직면한 문제의 해답을 독서에서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22년 수능 국어 영역 문제

  

  내가 다시 봉인 풀린 고3의 나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 미용실 말고, 사진의 그들처럼 책 앞에 서라. 허무함이 빠른 속도로 허무하게 사라지기 전에 네가 우주와 미생물에 가슴 설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달달 외운 역사보다 더 재미있는 역사가 책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라. 그리고 운동장으로 달려가라. 체육시간에 배운 적성에 안 맞는 운동 대신 앞으로 긴 시간 동안 즐길 수 있는 너만의 스포츠를 찾아 배우라.

 

  이런 꼰대의 말을 듣고 "눼눼~. 전 그냥 허고종 헌거 허쿠다(전 그냥 하고 싶은거 할게요). 누웡 오징어 게임 보쿠다(누워서 오징어 게임 볼게요)."라며 침대로 기어들어가도 괜찮다. 침대 머리맡에는 고이 접힌 쪽지가 있다.


시험의 결과를 떠나 홀가분한 지금의 시간이 아주 소중하다는걸 잊지 않기를. 넌 교과서를 향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내면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작점에 서 있어. 점으로 선도 만들고, 면도 만들고, 뭉치고, 뭉개서 던져보고, 날려보면서 너만의 작품을 만들어 나가길 응원해. 그러니 롸잇나우 당장 일어나랏!!                                         - 미래의 내가.







  긴 시간 자신과, 교과서와 싸움을 벌였을 우리 고니를 비롯한 수험생 여러분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차곡차곡 채워갈 여러분의 선택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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