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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Dec 03. 2021

못하는 요리를 또 해보았습니다.

생강 밀크티를 먹었지요. 조금요.

https://brunch.co.kr/@009e6b1ce84c4ca/33

<위의 글과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맛있는 생강 밀크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강렬한 삘이 왔다. "레시피대로!" 외치며 한치의 응용도, 유연함도 허용하지 않는 경건한 마음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우유 200ml
물 200ml
편생강 한 톨
홍차 잎 혹은 다른 찻잎 1숟가락
황설탕 1숟가락




  먼저 물, 블랙티 잎, 생강, 황설탕을 넣고 끓였다. 어제는 양이 너무 많았으니, 오늘은 레시피 재료 분량의 50%만 넣기로 한다. 10분을 끓여 우리라고 했는데 물이 끓으며 졸아들어서 점점 사라진다. 통장에 들어온 월급도 아닌 것이. 도저히 10분은 무리다. 재료의 양을 반으로 줄였으니 끓이는 시간도 반으로 줄이는 게 맞겠지? 이게 논리적이겠지? ('논리적'이 나오면 불안한데) 마지막으로 우유 100ml를 넣고 한번 '보글' 끓을 때까지 기다려 가스 불을 껐다. 오늘은 완벽했다. 마지막에 채로 찻잎을 걸러가며 머그컵에 따랐다. 오잉? 누가 먹다 남긴 것마냥 양이 턱없이 적다.




누가 먹다 남긴 것 같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생강 밀크티

  


  어제는 가스불에 끓이지 않고 전자레인지에 대충 돌려서 양이 많았던 거였구나. 레시피의 재료 분량이 맞겠구나. 깨달음이 행동보다 항상 한 박자 늦게 오는 이유는 무얼까? 깨달음 뒤에 행동을 하려면 가스레인지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도를 닦아야 가능한가? 그렇게 응용하지 말자고 외치더니. 또 멋대로였다. 앞으로 요리할 때 뇌는 잠시 꺼내 어디 기둥에 꽁꽁 묶어놓고 해야 할지. 다른 더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가지 위로가 되는 거라면 오늘의 생강 밀크티는 아주 맛이 있었다는 . 양은 쥐똥만큼이지만.


  생강 밀크티가 쥐똥만큼이면 쥐똥만 한 찻잔에 담아 먹으면 된다. 많이 먹으면 뭐하겠나. 잠시 후에 요가 수업에 가야 한다. '다운 독' 자세에서 요가 매트에 쏟아지는 밀크티와 조우하고 싶지는 않다. 요가 매트도 밀크티도 사랑하지만 둘의 랑데부까지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많이 먹지 않아도 괜찮은 걸로.


  요리를 할 때 배가 고파 죽기 직전이 아니라면 간을 보지 않는다. 나만의 철학이 있다... 는 아니고. 간을 본다고 무슨 맛이 모자라고, 그래서 뭘 더 넣아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간을 보는 건 나에게 슬프고도 의미 없는 일이다. 요리를 하는 동안 이 요리가 산으로 가는지, 가라앉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 조차 힘든 멍청이 앞치마를 두른 사람도 있다. 여기에.



운동은 수련이다. 어제보다 조금 나아지기 위해,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그런 게 좋다. 이제 그런 것만 믿는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발전.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모월 모일》에 나온 문장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발전'이라는 말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누군가는 요리를 하면서 간을 보지 않는 주부에게 버럭 호통을 칠 수도 있겠지만 난 지금 호락호락하지 않는 발전을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호통은 넣어둬 넣어둬~.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을 빌려서, 망하는 요리에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어제의 실패와 오늘의 실패는 다른 얼굴이다. 그 이유라는 걸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러니 나에게 요리는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일 다시 멍청이 앞치마를 두르고 "레시피대로!!" 외치며 무조건 생강 밀크티에 도전할 수밖에.



*요리 레시피 출처: 블로그 'MJ 후다닥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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