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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Dec 15. 2021

그대들, 잠시 안녕

저요오드식을 시작합니다.

  내 손으로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원두를 빵처럼 부풀리는 고도의 테크닉으로 커피를 내려 먹어야 고급지다 생각했다. 그래서 믹스커피를 끊었다. 믹스커피가 싫어서가 아니고 단지 고급져 보이고 싶어서. 나한테 보기 드문 대단한 의지였다. 귀찮고, 맛대가리 없는 밍밍한 드립 커피를 몇 년간 주야장천 마셔댔다. 그건 가식이었다. 처음부터 그 맛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분위기와 모양새를 동경했던 것이니.  


  믹스커피를 끊고 커피를 내려 마시다 보니 진심으로 그 밍밍한 맛에 길들여졌다. 어쩌다 믹스커피를 마셔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하는 괴상한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급지다 우기며 억지로 마시기 시작한 커피가 거짓 없이 나의 거짓 취향이 되었다.


  갑상선 수술 후 올해 3월에 방사성동위원소 치료를 받았다. 치료 전 2주간은 저요오드식으로 식이조절을 했다. 시험기간에 '시험 끝나면 하고 싶은 것' 리스트 작성에 진심이 듯 치료가 끝나면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를 진지하게 작성했다. 그 작은 기쁨으로 2주간을 버텼다.


  치료를 마치고 그동안 먹고 싶었던 치킨, 떡볶이, 과자, 라면, 치즈케이크 등등 모두 다 먹을 수 있었지만 한 달 정도는 치료 부작용으로 음식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맛있는 냄새는 나는데, 내 입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음식이 아니라 고무 같기도 하고 화학조미료 덩어리 같기도 했다. 향이 좋은 드립 커피도 입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향에 이어 마땅히 뒤따라 와야 할 당연한 그 맛이 없다. 세상 모든 음식에게 기대했던 맛에 꾸준히 배신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맛을 찾아가며 열심히 먹었다. 마음이 우울한 와중에 몸무게만큼은 한결같이 유지해 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란.


  또 뭘 먹어야 맛이 좀 느껴질까.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조용필의 노래처럼 먹을 것을 찾아 싱크대 문짝을 열었다 닫았다 헤매다 손님용으로 사놓은 믹스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그걸 한 번 마셔봐야 할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마셔보는 믹스커피가 입 안을 부드럽게 했다. 맛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드립 커피에 없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맛없는 세상을 위로해주는 믹스커피의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때부터 다시 믹스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애써 만들어 놓은 취향 따위는 그만 됐다.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짓의 내가 아니라 솔직한 스스로가 되었다. 한때는 부끄러운 취향이라 생각했지만, 이젠 나 믹스커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때로 아주 작은 믹스커피로도 나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다.


  수술과 치료 후에도 남아있는 암세포 검사를 위해 오늘부터 2주간 다시 저요오드식이 시작된다. 어제 마지막으로 나의 진솔한 내면과 마주하며 믹스커피를 한 잔 마셨다. 당분간 못 먹을 치킨, 라면, 과자도 먹었다. 많이. 우리 2주 후에 찐하게 다시 만나요. 그대들, 잠시 안녕~.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마저 들으면서 검사 후 먹을 to-eat list 작성을 시작해야겠다.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라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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