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봄 Dec 23. 2021

‘주워 먹을거리’를 주의하라

저요오드식을 합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일회용 투명 플라스틱 컵 한 줄을 사 오신 적이 있었다. 여리 여리하고 투명한 컵이 너무 예뻤다. 포장지에는 컵을 세게 잡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있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살고 있던 청개구리 등판! ‘흥, 이깟 경고 따위’를 외치며 컵 하나를 몰래 꺼내 ’빡’ 하고 세게 움켜쥐었다. 플라스틱 컵이 ’찌지직’ 길게 금이 가며 갈라졌다. 컵을 쥔 손에서 온몸으로 전해지던 짜릿한 해방감과 쾌락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행히 엄마가 그 모습을 보지 못하셨으니 내 등짝은 아직까지 무사하다. 하지 말라는 걸 꼭 해봐야 하는 건 귀여운 호기심인가 못난 몽니인가.



  


  하면 안 되는 것을 자꾸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다 보니, 하면 안 되는 것이 간절하게 하고 싶어지는 딜레마에 빠졌다. 갑상선암 치료를 위해 저요오드식을 해야 한다는 타당한 이유가 있음에도 천일염과 유제품, 해산물 등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지나친 제한이 맞다. 먹어도 되는 음식을 찾는게 너무 어렵다.

  난데없이 식빵과 마들렌을 만들어 먹어보고 싶다며 도구들을 검색한다. 난 베이킹의 ‘ㅂ’도 모르고, 이런 음식은 지금 먹을 수도 없다. 식생활의 자유를 제한하는 저요오드식에 대한 심리적 반발이 커다란 부메랑이 되어 ’휘익 휘익’ 파동을 일으키며 나를 향해 무섭게 날아오는 게 보인다. 님아, 그 결제 버튼은 누르지 마오.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은, 힘들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면 피해 갈 수 있다. 숨겨진 지뢰는 다른 곳에 있다.

 

  고기는 하루에 탁구공 크기만큼 먹을 수 있다(마음속으로 아주 큰 탁구공을 상상하며 미소 짓는다). 고기를 굽고 아이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이와 함께 먹는 식탁에는 당연히 저요오드식과 아닌 음식이 함께 차려진다. 고기를 먹으며 시판 소스를 푹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시판 소스는 금지다). 냉철하다는 전두엽이 손 쓸 새도 없이 순식간에 손이 벌인 일이었다. 재채기나 무릎반사처럼 자동화된 행동인가. 본능이 행하는 걸 어찌 말릴 수 있겠는가.

  함정은 소스처럼 의외로 하찮은 곳에 숨어 있다. 가령 김밥에서 빠진 스팸 조각이라던지, 샌드위치에서 잘라낸 식빵 테두리. 먹다 남긴 아이스티 같은 거다. 아이는 이런 것을 흘리거나 남긴다. 김밥, 샌드위치, 아이스티 같은 금지 음식들은 전두엽의 울타리 안에 있다. 제어 가능하다. 하지만 김밥에서 떨어져 나온 하찮은 스팸 조각, 샌드위치에서 잘라낸 하찮은 식빵 테두리, 바닥에 조금 남은 아이스티는 10년 넘은 주부 인생에 각인된, 방심하기 쉽고 자동화된 ’주워 먹을거리’다.


  자고로 ’주워 먹을거리’는 먹은 음식으로 카운트하지 않는 법. 스팸 조각 주워 먹었다고 김밥을 먹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식빵 테두리를 먹었다고 샌드위치를 먹었다고 하지 않는다. 바닥에 조금 남은 아이스티를 한 모금 빨았다고 아이스티를 마셨다고 하지 않는다. 박준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읽었다고 박준 시인을 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세상은 냉정하기도 하지. 내가 카운트 하지는 않는다고 식이조절에서 ‘주워 먹을거리’를 제외해주는 건 아니다.







  인간은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음식을 주워 먹는가? 나만 갖고 있는 고민 같진 않다. 연구 논문을 검색해봤다. 에이, 못 찾겠다. 역시 나만의 문제인가?


  집이 이렇게나 위험한 곳이다. 집안 곳곳이 지뢰밭이다. 하루를 마치며 오늘 또 아무 생각 없이 얼마나 많은 지뢰를 밟아 터트렸는지, 뭘 또 얼마나 집어 먹었는지 복기하고 반성한다. 내일은 조금 더 정신 차릴 수 있을지. 내가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 그건 또 불가능해 보이고.

작가의 이전글 그대들, 잠시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