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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Apr 10. 2022

지난주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1. 누가 내 이름을?


  학창 시절 좋아하는 친구의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리며 공책에 써 본 적이 있다. 많이 있다. 그리고는 누가 볼까 까맣게 까맣게 지웠다. 공책에 수많은 까만 동그라미들은 영어 단어가 아니었다. 이름을 조용히 부르고, 쓰기만 해도 그 아이가 옆에 와 있는 것처럼 마음이 살랑거렸다.(뭔가 '분신사바' 같다.)


  1학년 어린이들과 처음으로 학습지를 풀었다. 어린이들이 아직 한글에 익숙하지 않아 실물화상기로 학습지를 비추며 문제를 읽어주고 같이 푼다. 학교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알아보고, 그동안 잘 지켰는지 ◎, ○, △ 모양으로 스스로 체크해보는 학습지다. 설명을 해주고, 사실 답도 거의 알려준다. 그래도 어린이들에게는 학습지라는 것이 생김새부터,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자꾸 해보라고 시키는 말투까지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상대다. '문~ 크리스탈 파워 메이크~업!'을 마음속으로만(!) 외치고 친절한 선생님으로 변신!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한 명씩 확인하고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설명을 아주 많~이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학습지를 검사하다 뒷목을 잡게 하는 사건이 대량 발생할 수 있다. 아이고야~. 아직 학습지는 무리일까?  


"자, 다 했으면 앞으로 가져오세요."


아이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온다.

"선생님, 여기 선생님 이름도 썼어요."
"응? 아, 네~."


어린이들이 연이어 제출하는 학습지를 받고 정리하느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고 대답만 했다. 오후에 어린이들 하교 후 학습지를 확인하다 혼자 빵 터졌다. 이게 뭔가. 자기 이름 밑에 내 이름, 문제 빈칸 사이사이에 내 이름, 자세히 보니 동그라미 모양 안에도 깨알같이 내 이름. 학습지 절반만 찍은 사진 안에도 내 이름이 10번이나 쓰여 있다. 사랑이 넘쳐흐르고 표현도 화끈한 어린이다. 내가 설명을 반복하는 동안 이 어린이는 학습지 글자 사이사이 빈틈을 찾아 선생님 이름으로 채워 넣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이렇게 열심히 써주다니. 아이고 영광입니다.


  날 떠나지 않고 몸 안에 어딘가 숨어 살고 있었던 설렘 세포가 어린이들 덕분에 다시 살아나 활기 친다. 날마다 회춘하는 기분이다. 순수한 어린이들의 귀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고 헤헤거리며 마냥 좋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2. 누가 내 책상에 커피를?


  때는 화요일. 출근을 했는데 내 책상에 낯선 컵이 놓여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어떤 물질이 들어있을지 모르니 섣불리 손대지 않는다. 일상적이지 않다. 고로 위기상황이다. 차분하게 수사를 시작한다.

엉덩이 탐정! 정체를 밝혀줘

'이른 시간에 누가 우리 교실에 커피를?'


아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일찍 출근하는 편이라 나보다 먼저 출근한 선생님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어제 내가 퇴근한 후에 누가 우리 교실에 왔었나? 그런데 주인도 없는 교실에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고 쓰레기를 책상 위에 그냥 두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도저히 모르겠다. 증거물 감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침착하게 컵을 툭 건드려보았다. 묵직하고 따뜻하다. 뚜껑을 열었다. 커피가 맞다. 마시고 버린 컵은 아니었다. 아까운 커피가 식으면 안 된다. 마셔야 할지, 버려야 할지, 다른 사람에게 전해줘야 할지 커피 골든타임을 놓치기 전에 수사를 서둘러 마무리해야 한다.


  컴퓨터를 켜고 단서를 찾아 메신저를 확인했지만 오늘 새로  메시지는 없다. 학교에서는 공적, 사적 소통을 모두 *메신저로 주고받는다.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수사다. 다음 단계 핸드폰 디지털 포렌식은 아니고 그냥 켰다. 확인하지 않은 문자가 있다. 친한 언니 같은 선생님이다.


"굿모닝^^ 카푸치노 교실에 갖다 놨어~. 상가에  곳이 파바밖에 없더라.   사면서 샀는데;; 거품 위에 설탕 뿌려서 젓지 않고 먹으면 맛있더라. 바쁠 텐데 답장 말고 수고!!^^"


  아~ 평화로운 사건 종결. 좋은 사람이 아침 일찍 나를 생각해 주었고, 덕분에 엉덩이 탐정 1편을 찍었고, 하루가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했다. 바쁜 아침에는 더더욱 정신없을 나를 배려해 답장하지 말라 했지만 어찌 답장을 안 할 수 있으랴.


  설레는 봄이고, 아직 사랑받고, 사랑한다.

카푸치노에 알맞게 떨군 버들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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