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찬가

같은 템포 다른 노래

by 이수



"너는 어느 순간부터 겨울이라고 생각해?"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뭐 인생에 실질적으로 득이 되는 게 없는 쓸데없는 물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집 둘째가 그랬다.) 나 같은 경우는 외출할 때 입김이 보이면 그날부터 겨울이 시작됐구나 생각한다. 그래서 날이 추워졌다 느껴질 때 일부러 고개를 들어 숨을 내뱉는다. 봄여름가을 내내 겨울을 그리며 살았던 터라 오늘이 혹시 그 첫날이 아닐까 하는 설렘으로 좀 더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내쉬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더 더운 숨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그리고 난 보통의 사람들보다 색을 조금 더 잘 구별해 내는 것 같으니까 아주 조금의 불투명함도 알아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였다. 겨울은 내게 단순히 춥고 시리기만 한 계절이 아니다. 붓으로 아무렇게나 긋어둔 듯한 나뭇가지들과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세상이 왠지 모르게 포근하고 안락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밖에도 좋아하는 이유는 많다. 겨울옷(특히 니트나 플리스)이 따뜻하게 몸을 감싸는 게 좋고 두툼하게 껴입고선 버스좌석에 폭삭 기대앉으면 옷 안의 데워진 공기가 살짝 새어 나와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것도 좋아한다. 코끝이 찡해지는 알싸한 느낌 또한 그렇다. 내 질문을 지나친 누군가는 자신의 겨울이 길거리에 붕어빵가게가 보일 때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답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착실히 쌓여가고 있다. 정확히 누가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는 하나하나 연결되지 않지만 겨울의 첫 신호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찾아 의식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캐럴이 들려오면, 12월 1일이 되면, 마트에서 호빵이 보이면, 손끝이 시려지면 처럼 갖가지 눈에 보이고 마음에 와닿는 것들로 겨울을 마중 나간다.



비를 사랑한다 말하려면 비에 젖는 것까지도 품어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식으로 내게 겨울을 사랑해?라고 묻는다면 난 사랑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거기엔 내가 차를 몰지 않고 출퇴근하는 뚜벅이라는 점과 버스에 올라타 이동하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것도 한몫을 톡톡히 한다. 멀미를 달고 살면서도 그런 시간이 좋은 거 보면 난 그 시간도 사랑하나 보다. 물론 옆자리에 향수나 알 수 없는 체취가 짙은 사람이 앉으면 고역이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자리 옮길 줄 몰랐던 나는 이제 스스로 일어나 다른 자리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남은 좌석이 있다는 전제하에다. 대부분은 꽉 들어찬 버스라 시도도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보자면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이라서가 가장 큰 것 같다. 공부하지 않아서 괜히 마음불편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닌 그냥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버스에 실려 노래를 듣거나 웹툰을 본다. 그러다 멀미가 나면 진동으로 알람을 맞춰둔 휴대폰을 들고 가만히 눈을 감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고선 이런저런 생각에 뛰어든다. 창 밖으로 스쳐가는 자동차들을 보며 저 차에 탄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살았을까, 무슨 일이 있어서 저쪽 방향에 가는 걸까, 하늘에 달이 예쁘다. 요즘 달 옆에 별 하나가 꼭 붙어 뜨던데 오늘도 함께일까. 함께네. 예쁘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며칠 전 눈이 고요히 쏟아지던 날 일부러 천천히 눈을 맞으며 걸었다. 아침에 날씨를 한 번씩 검색해 보곤 하는데 그날은 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패딩은 곧 죽어도 손이 잘 가지 않아 만만하게 걸치고 나온 플리스의 모자를 있는 힘껏 당겨 쓰고는 목도리로 꽁꽁 싸맨 뒤 바깥으로 한발 내디뎠다. 이 순간 내 드라마의 배경음악은 스포티파이에서 W가 공유해 준 자신의 플레이리스트. W는 내가 퇴근하며 눈사람이 돼버리는 게 아니냐면서 몇 번씩이나 걱정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런 걱정에서 더 자유로워졌다. 걱정은 사랑 없인 되는 게 아니니까. 부족함 없이, 어쩔 땐 넘치게 사랑을 안겨주는 W덕에 나는 40분쯤 되는 시간 동안 외로움은 느낄 새도 없이 두 눈 가득 하얀 눈을 담기 바빴다. 예쁘니까, 이렇게 천천히 바람을 타지 않고 내리는 눈은 의외로 보기 드무니까 손 시린 건 상관없었다. 걷다 말고 멈춰 서서는 초점을 맞추고 밝기를 내려 사진으로 남겼다.



우린 아직 흑백영화처럼 사랑하고

검정치마/ 한시오분中


노래가 이어폰을 타고 귓가에 차례로 넘어가다가 한 노래가 귀에 꽂혔다. 검정치마의 한시오분. 저 노래가사가 들리는데 정말 세상이 하얗고 까만 게 무채색 그 자체라 지금을 위한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나는 내려오는 눈송이의 수만큼이나 안정적이었고 그래서 약간의 우울도 없이 W를 생각해갈 수 있었기에 홀린 듯 반복재생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겨울에도 푸른 몇몇 나무의 잎사귀에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내려다보며 꼭 크림을 올려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이 달게 보였다. 세상이 써 인상 쓰게 될 날에 꺼내보려 또 사진에 담았다. 그러다 W의 전화가 왔다. 퇴근했다는 말에 얼른 수고했다고 말해주고는 한시오분을 들으며 퇴근하기를 권했다. 이날 내가 가진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모습을 거쳐간 당신이라면, 나와 닮은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몇 분 남짓의 시간을 좋아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전화를 끊고 나도 다시 한번 처음부터 재생해 들었다. 우린 같은 템포의 다른 노래고 한시오분처럼 너 하나만 바라보며 매일 다른 이유로 널 사랑한다는 가사를 모두 지나 노래는 끝났지만 W에게 전화가 오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유는 회사사람을 어쩌다 만나게 되어서 노래를 바로 듣는 것을 실패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분명 나보다도 많이, 수없이 들었을 노래지만 정말 들어주느라 늦은 거였다. 이런 감성을 가진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겨울의 눈 오는 풍경처럼 당신을 사랑한다. 그렇게 겨울이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겨버렸다. W는 눈이다. 흑백세상을 다디단 디저트로 만들어버리는, 기꺼이 맞고자 뛰어들어선 눈에 담느라 바쁜 하얗고 포근한 눈.



나에겐 겨울이 그런 낭만이다. 굳이 눈을 맞고 붕어빵집을 찾아 골목을 헤매어보고 뜨거운 호떡을 호호 불어 식혀서 입에 넣는다. 몸이 시리지만 털이 가득한 플리스를 망설임 없이 찾아 걸친다. 거리 옆 쌓인 눈을 일부러 밟고 신발 밑창을 산책로에 눌러 비벼본다. 굳이 왜 그러나 싶은 것들을 자꾸 챙겨하고 싶다. 겨울도 나를 자신의 낭만 중 하나로 여겨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미운 부분도 품어줬으면 좋겠다. 그럼 난 겨울에 피어나는 동백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겨울의 절반을 보내는 중이다. 남은 절반동안 몇 번의 눈을 더 눈에 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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