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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Nov 20. 2018

남겨진 자의 전쟁

―박지리의 <번외>, 최진영의 <비상문>을 읽고

내 나이 스물셋, 오래전에 죽은 프랑스 남성 철학자의 책을 읽다가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자살을 하느냐 마느냐라고 그는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보다 한참 전에 셰익스피어라는 남자도 ‘햄릿’이라는 남자의 입을 빌려 말하지 않았는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 

당시 나는 휴학을 하고 처음으로 ‘밥벌이’를 시도해보고 있었다. 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그때까지 아르바이트 한번 안 하고 학비와 용돈을 받아 써왔다는 ‘혜택’에 대해, 스스로를 무능력한 인간으로 느끼다가 기어코 저지른 짓이었다. 교정교열과 잡무로 나인투식스 근무를 하고 한 달에 80만 원을 받았다. 그때 나는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우울감을 마주쳤다. ‘이게 삶이구나’ 하는. 마치 ‘이것만 삶이구나’와 같은. 그리고 나는 내 우울을 부모가 아닌 ‘아빠’의 삶에 대입했다. 아빠가 평생 이렇게 무의미하고 괴로운 출퇴근을 반복하며 우리를 먹여 살린 거구나.

그러니까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처음 읽었을 때, 나에게 시지프 즉 영원히 무의미한 노동의 굴레에 묶인 인간이란 명백히 ‘성인 남성’이었다. 이 남자가 인생이라는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는 방식은 한마디로 ‘자살’이 아니라 ‘살자’다. 자살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무의미한 삶이지만, ‘하지 않음’을 택하는 것, 고통 어린 눈으로 세계를 직시하며 끝까지 오래 살아남는 것 말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 년가량이 지난 지금의 나는 이 ‘자살/살자’의 문제에 대해 그 시절처럼 명징하게 사고할 수는 없다. 나는 신화 속 시지프가 아님은 물론이고, 20세기 프랑스의 이름난 남성 철학자도 아니며, 심지어 저학력으로 성실히 노동해 자수성가한 ‘전국 보험왕’ 우리 아빠조차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자살률 세계 1위를 달리며 어쩌다 2위로만 내려가도 신기해하는 나라,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단연코 자살인 나라의 국민. 주변의 가깝고 먼 많은 여성들이 자살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스스로 응급실에 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 사회의 여성. 이 혹독한 세계와 눈싸움하듯이 지지 말고 당당히 살아가라는데(카뮈), 세계는 점점 더 ‘살인마’를 닮아가는 것 같다.      


약속을 지키는 “귀여운” 인간들의 세계

이 와중에 ‘자살/살자’의 세계는 이전처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 구분이 나날이 흐려져가는 가운데, 이쪽도 저쪽도 ‘주체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채 생을 이어가고 있는 어떤 ‘남은 자들’에 대해 소개해볼까 한다. 최진영의 소설 <비상구>(미메시스, 2018.9)와 박지리의 소설 <번외>(사계절, 2018.9)의 화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나의 거울 같은 인물들이기도 하다.     


박지리, <번외>, 사계절, 2018
최진영, <비상문>, 미메시스, 2018


신호등 색깔이 바뀌자 사람들은 약속을 지켰다. 다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비상문, 27쪽)   

빨간불에 멈추고 파란불에 건너기로 한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귀엽다. (...) 빨간불에 멈추고 파란불에 건너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하늘로 붕 떠오른 사람도 귀여울 순 없을까.(번외, 124쪽) 
    


<비상문>과 <번외>는 둘 다 중단편에 가까운 한 권짜리 책으로, 청소년의 자살 혹은 살인을 다루고 있다. 죽음 후에 남겨진 화자는 일상 속 신호등의 풍경을 보면서 이러한 확신 혹은 의문을 품는다. 생존을 사회 일반의 ‘약속’으로 상정하며, 자살은 그 약속을 깨뜨리는 행위로 묘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일반에 대한 입장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비상문>의 화자인 ‘나’는 일반이 죽음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거의 본능처럼 인지하며 자신도 그 일원이라고 자각하고 있다. 반면 <번외>의 화자인 ‘나’는 시종일관 냉소를 보이는데, 맥락상 ‘귀엽다’의 의미는 조롱 이상이 아니다. “거 되게 살고 싶어 하네”라는 식의 문장이 여러 번 강조되어 나오듯이, ‘나’에게 일반의 생존 의지라는 것은 거대한 우스개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그 우스개의 일부로서 여전히 살아 돌아다니는 ‘귀여운’ 개체라는 사실이다.

<비상문>의 화자는 3년 전 열여덟 살 동생을 잃었다. 동생 최신우는 학교 옥상에서 추락해 자살했는데,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다. 화자는 사후 CCTV를 통해 ‘미니어처’, ‘아기 짐승’처럼 보이는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했다. 자살의 징후가 없었고(남은 자들이 보기에는) 유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남겼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화자에게는 동생이 ‘왜’ 자살했는지가 생의 과제처럼 남겨졌다. 동생이 보던 문제집과 교과서 귀퉁이에 뭐라도 써 있을까 싶어 3년이 지나서까지도 들추어 보곤 하는 삶이다. 꿈이나 상상 속에서 동생을 만나면 매번 ‘그래도 죽지 않을 것’을 설득하려 애쓴다. 화자가 아르바이트하는 약국에서 약을 정기적으로 조제해가는 우울증 환자들의 존재를 기억하며, 죽지 않고 다시 와주길 바란다는 설정 또한 그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어떻게든 찾아볼게, 내가. 

뭘 해, 형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너한테 꼭 필요하다면.     


덤덤하게 읽어가다가 화자의 상상 속 애원에 이르러 울음이 터지고 말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결국 이 소설의 전제 그리고 결론은 ‘모른다’이다. “어째서 삶에 이유를 붙이려는 거지?”라고 되묻는 ‘보통 사람’의 무지. 삶에는 이유가 없다면서 죽음에는 이유를 붙이려 하는 모순. 보통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되지만 너도 보통 사람인 양 하루만 더 살아달라고 말하는 이기심. 이처럼 이 소설의 세계관에서 ‘자살’은 타자의 것이다. 내가 건널 수 없는 강. ‘이유’라는 건 결국 강을 건너지 않은 자들의 욕망이고, 이 소설의 화자 혹은 소설적 자아는 그 이유에다 ‘비상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화자는 동생의 자살이 일종의 ‘출구’였다고 짐작한 것이다. 아니, 출구였어야만 한다는 절박함이다. 적어도 그 정도 답은 얻어야만 ‘문 안쪽’에 남겨진 자가 살아나갈 수 있다. 자살이 탈출조차 아니라면 대체 이 세계는 뭐가 어떻게 되어먹은 것인가?     


생존자에게 주어진 배역

<번외>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일단 이 소설의 주요 사건은 자살이 아니라 살인이다. 전체 학생들이 봄 소풍을 떠난 날, 여러 이유로 소풍에 가지 않은 학생들이 시청각실에 모여 부조리한 영화를 본다. 그중 한 학생인 K가 직접 편집한 영상이다. 쉬는 시간이 끝났는데 K가 돌아오지 않자, 선생님은 ‘나’에게 그를 찾아오라고 지시한다. K가 학교를 유유히 떠나는 걸 본 ‘나’가 혼자 돌아왔을 때 시청각실의 열여덟 명 모두는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 살인자의 ‘도주’ 장면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자 참사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다.

살인범 K의 현재는 작품 속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학교를 나간 뒤 자살을 했는지 검거가 됐는지 수배 중인지. (내가 무의식중에 K가 자살했을 거라고 여겼다는, 혹은 적어도 자살은 했기를 바랐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K의 행적이 아니라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도 분리하는 ‘나’ 자신의 행로다. 소설 첫 부분부터 ‘나’는 자살과 살인을 묶어 지극히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알고 보면 스피노자도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한 번쯤은 도대체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죽어 버릴까 하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간디도 너무 힘이 드는 날엔 물레에서 뽑은 실로 제국주의자들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지도 모르고.”), “삶을 더 자세히 해부해 보기 위해, 자기 자신의 죽음을 핀셋 삼아 삶을 헤집어 보는 고차원적인 자살”(“철학가의 자살”)이 가능하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오직 무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다음 단계로 이끌고 나가기 위하여 행하는 살인”(“철학가의 살인”)도 가능하지 않은가 묻는다. 이렇듯 <번외>의 화자에게 죽음/죽임은 마치 데칼코마니와 같다.

모두가 불쌍하게 여기며 ‘생존자’ 대표로서 꿋꿋이 살아가주길 바라는 이 소년은 오히려 살인범 K에게 동류의식을 느낀다. 하지만 거기에 안착하는 것도 실은 가능하지 않다.      


죽는 것만 진짜 같아. 죽는 것만 진짜야. 그거 말곤 밥을 먹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집에 들어가는 것도,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도 모두 다 위장 같아. 몰라. 왜 그런지는. 그냥 난 그런 생각이 들어. 넌? 넌 안 그래?     


그저 “진짜”가 진짜인지 실험해보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 K. 실험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정작 자신은 바로 죽지 않은 채 떠나버린 K. ‘나’는 사건 전에 K와 드문드문 나눴던 이런 식의 대화들을 떠올리고 마치 자신이 K인 양 사유를 진전시켜보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거 되게 살고 싶어 하”는 “귀여운” 인간 종에 속해 있고 그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심한 꽃가루 알레르기로 숨을 못 쉬고 쓰러진 적이 몇 번 있는데도, 일부러 꽃나무 숲으로 가거나 전속력으로 달리거나 하는 나. 그러나 정작 지갑 속에는 언제든 구조될 수 있도록 꽃가루 발작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귀여운” 나.

이 소설은 참사 희생자들의 1주기 추모제가 있었던 다음 날 약 하루 동안 벌어지는, 그 자체로 ‘번외’ 같은 이야기이다. ‘나’는 사소한 이유로 갑작스레 조퇴를 하고(생존자이기 때문에 조퇴는 물론 어떤 것도 허용된다) 종일 학교 밖 이곳저곳을 우연에 의지해 돌아다닌다. 이 학생의 교복을 보고 각계각층 여러 인물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 엄청나게 바쁜 우리도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추모의 시간을 가졌었어. 앞서 <비상문>의 화자가 끝없이 묻는 것이 ‘죽음’의 이유라면, <번외>의 화자가 묻는 것은 오히려 ‘추모’의 이유다. ‘나’는 한 번도 K가 왜 그런 살인을 하고 사라져버렸는지 묻지 않는다. 되레 당연하게 추모를 했다는 낯선 사람들에게 매번 질문한다. “왜요?” 왜 그렇게 바쁜데도 짬을 내서 굳이 추모를 한 건데요, 라고.     


본인이 지금 여기 왜 와 있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아, 그런 이유라면 역시 태어났기 때문에. 라텍스 장갑을 낀 손에 다리가 잡혀 강제로 세상에 끌려 나왔기 때문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K가 살인한 이유가 없는(또는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존자인 ‘나’는 왜 살아남아서 번외의 하루를 부유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차라리 ‘태어나서’라고 해버릴 만큼, 그 이유란 희박하다. 왜 태어나서 왜 죽었는지 이유도 모르는 주제에, 그저 아름답게 포장해서 추모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사회가 ‘나’에게는 너무나 “귀엽고” 동시에 역하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도 죽인 자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양쪽으로부터 소외된 ‘번외’의 존재인 ‘나’를, 세계는 ‘공범자’인 동시에 ‘대신 살아야 하는 자’ 취급한다. ‘번외’의 존재에게 이 두 가지 모순된 역할을 강요하면서, ‘번외’는 도리어 ‘전체’가 되어버린다. 본질적인 이유(삶의 부조리)는 외면한 채 가식적인 추모에 열을 올리는 세상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가는 이 하루의 이야기는 그래서 인생 전체이기도 하다. 

어쩌면 2년 전 유명을 달리한 이 소설의 저자에게는 살아 있는 일이 ‘생존자’로서 그러한 끔찍한 연극에 계속해서 동원되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죽임의 최종 가해자 그 자체인 세상이 도리어 ‘내가 얼마나 깊이 추모하고 있는지’를 생색내는 꼴을 견뎌야 하는 하루하루. 그에 비하면 K라는 살인마의 존재는 소박한 것이었을지도.     


<비상문>과 <번외>는 ‘잃고 난 뒤’ 사유를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소중한지도 몰랐는데 실은 소중했던 것(특정 사람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을 잃고 나서야 이들의 내면에서는 ‘죽느냐 사느냐’ 못지않게 치열한 사유가 시작됐다. 이러한 사유를 지금 내가 처한 공기와 눈높이에서 섬세하게 따라가보고자 했다. 좋든 싫든 나는 ‘여기’ 한가운데 있으니까. 십 년 전의 내가 그 유명한 철학책에서 마주했던 ‘자살’과 지금의 내가 나를 둘러싼 사회에서 목도하고 사유하고 있는 ‘자살’은 같은 것이 아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임에는 분명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 리얼한 역동성과 복합성을, 이 소설들이 다시금 일깨워준다. 

소설 속 두 화자에게 그러했듯, 아주 가까이에서 그것은 ‘이미’ 벌어졌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또는 내 안의 무언가에게. 그것과 자신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남겨진 이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사유 전쟁’. 이게 우리의 몫이다.




양선화 "여자, 소설: 한국 여성 작가 장편소설 리뷰"


내 이십 대 전체를 쥐고 흔든 것은 너무나 자명하게도 ‘소설’인데, 더 정확히 말하면 ‘남자가 쓴 소설’이었다. 지금은 어느덧 반대가 되어서, 가장 사랑했던 박민규를 절독했으며 / 전작을 사서 모았던 김도언은 이름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 거침없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천명관의 세계관이 진부하게 느껴진다. 김영하나 김연수 같은 명실상부 지적이고 세련된 중견 작가의 소설을 더 이상 업데이트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안 생기고, 조정래 김훈 황석영 등 할아버지들의 훈화 말씀은 뭐 말할 것도 없다.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나니 여자 소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데, 사실 여자들은 늘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그렇다고 내가 어떤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기점으로 일부러 남소설 여소설을 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냥 어느 날 서점에 가서 쓸어 담아온 책들이 다 여소설인 걸 발견하며 놀라고... 뭐 그런 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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