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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Jun 29. 2018

난민이 누구인가 묻는 대신에

―표명희, <어느 날 난민>을 읽고

어느 날 난민이 의식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전까지 나는 난민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없다. 당사자이거나 관련 연구 및 활동을 해온 사람이 아니고서야 대체로 나와 비슷한 처지이지 않을까?


난민은 누구인가. 일반인 출연자들이 사연을 풀어놓는 토크쇼에서 한 엠씨가 출연자의 모습을 보고 대뜸 외쳤다. “아하하, 난민이네!” 출연자(일명 ‘고민 유발자’)는 키 190센티에 몸무게 50킬로 대로서 제때 먹지도 자지도 않는 게임 ‘폐인’이었다. 

난민은 누구인가. 국가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고 위험에 내몰린 한국 여성들 가운데 일부는 스스로의 처지가 ‘난민’과 다를 바 없다 했다. 그러니 외국에서 ‘난민’으로 받아들여줘야 한다고 했다.

외모 비하 농담 또는 ‘피해자’의 자조로서의 난민 반대편에는 그 유명한 사진 한 장이 있다. 구글에 ‘난민 아이’라고만 치면 바로 뜨는 사진. 터키 해변으로 떠내려 온 시리아 어린이의 엎어진 주검.       


그러던 어느 날 난민이, 이번엔 좀 더 실제적이고 양이 불어난 형태로 사회적 담론 가운데 뛰어든다. 제주도에 예멘 난민 500명이 와 있는데 다 젊은 남자라더라. 이러한 소식은 무엇보다 140자 트윗과 그에 걸맞은 사진의 형태로 우리에게 던져졌다. 사진을 묘사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안심할 만한’ 난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빼빼 마른 아이의 갈비뼈, 얼굴을 전부 가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성의 커다란 눈망울이 아니었다. 

그러자 저들은 이슬람×남성이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며, 나이키 신발을 신고 비행기를 타고 와서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진정한 난민이 아니라는 항의가 터져 나왔다.     


난민은 대체, 누구인가.     



표명희의 청소년 장편소설 <어느 날 난민>을 읽었다. 최근작이라 우연히 읽은 것이 아니다. 서점 검색창에 ‘난민’을 적어 넣어 발견한 소설이다. 난민이 의식 속으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내가 난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 부분을 가장 많이 착각하는 듯하다. 난민을 의식하자마자 자기가 난민을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을 만나는 창은 무엇보다 책, 그중에서도 소설이므로, 서점에서 ‘난민’을 검색하는 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은 공항 근처의 섬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사람 사는 집보다 비어 있는 새 건물이 더 많은,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공간이다. 배경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이곳은 영종도라고 짐작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동시대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분명해 보인다.  

이 섬에 있는 법무부 산하 난민지원센터는 해안가에 덩그러니 들어선 최신식 건물로 재현된다. 이 또한 실제 센터를 모델로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건물에는 흰색 울타리(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은 철제)가 둘러쳐져 있는데, 주민들은 이 정도 보호막으로는 자신들이 안전하지 않다고 반대하고, 시민단체는 섬에 분리해놓은 것도 모자라 펜스까지 쳐서 가두는 것은 난민의 권익에 위배된다고 반대한다.

모두가 각각의 이유로 ‘반대’하는 이 건물은 지원센터의 소장과 주임이 관리하고 있다. 공무원으로서의 책임감이든 개인적 선의든 간에 이들은 지원센터를 정착시키려 애쓰고, 일종의 꼼수를 짜낸다. 난민지원센터 이름을 ‘외국인 지원 캠프’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학부모의 교육열을 이용한 영어 캠프 행사를 열기도 한다. 

이 새로 연 ‘캠프’에는 아직 소수의 난민들만이 입주해 생활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난민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되어야만 자기 존재를 구조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하다.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우리가 ‘난민이란 누구인가’ 묻는 일은 온당한가? 아니, 이 질문은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소설에는 딱히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없다. 대신 시작을 여는 인물은 비혼모(로 짐작되는) 해나와 그의 아들(로 짐작되는) ‘민’이다. 해나는 민을 데리고 무작정 영종도에 내려왔듯이, 또 무작정 민을 ‘영어 캠프’에 보낸 뒤 돈벌이를 위해 떠난다. 이때부터 민은 난민센터에서 ‘난민 지원자’들과 함께 살게 된다. 

아마도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만들어냈을 난민 지원자들의 다양한 이력이 곧 이 소설 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뚜앙이 산다. 뚜앙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국적을 아예 가진 적이 없다. 수상가옥에서 떠다니듯이 살아왔다. 그러한 정처 없음 탓에 실연을 하고, 아버지의 국적을 갖고자 한국에 왔다.

명예살인으로부터 도망쳐 온 인도의 찬드라가 산다. 찬드라는 고향을 떠나 대도시 대학교에 진학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자유연애를 하지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에 속아 고향에 돌아온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구덩이에 던져져 살해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더 이상은 차도르를 벗을 용기가 없다. 

중국의 지배 민족인 한족 아내와 소수 민족인 위구르족 남편이 산다. 남편은 위구르족 독립 투쟁을 위해 위장결혼을 한 것이었지만, 가정이 투쟁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함께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어온다. 하지만 이들 부부 사이의 투쟁은 계속된다. 설상가상 큰아들 진진은 작은아들 샤샤를 마치 ‘한족이 위구르족을 박해하듯’ 때리고 괴롭힌다. 

아프리카 부족장 딸인 흑인 여성과 프랑스어 선생인 백인 남성 커플이 산다. 사랑을 위해 부족 공동체의 관습과 위협으로부터 도망쳐온 이들은, 난민이 아니라 마치 자원봉사자들처럼 다른 이들을 활기차게 도우려 한다.

말이 없고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간혹 폭식을 하는 ‘한국 아이’ 민이도 이곳에서 이물감 없이 나름의 적응을 해나간다. 민이의 취미인 퍼즐 맞추기처럼, 이들 각자의 새로운 삶이 한데 맞춰져 일종의 ‘가정’이 탄생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완성도와 재미를 갖춘 빼어난 작품으로서 추천할 수 있느냐 하면,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다. 지나치게 작위적이거나(특히 진수라는 퀴어 경찰에 얽힌 대목들), 극단적인 설정을 감행한 부분들(이건 스포일이라 생략)이 마음에 걸렸고, 메시지를 단순화해서 노출하는 문장들(“눈부신 영혼의 소유자인 그 역시 세상에 흔한 난민의 한 사람”, “이 지구별 위에서 인간은 이래저래 난민일 수밖에 없어.”, “난민 유전자를 나눈 사람들의 미세한 연대로 이루어진 게 인류 아닐까요.”)이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작품 전체에 대한 부정보다는 부분적 아쉬움 정도로 남겨두고 싶다. 이 시기에 이런 소설의 등장 자체가 귀하기 때문이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 문학적으로 형편없는 소설이라고 연설하는 문학충들을 떠올려본다. 한국 내에서 난민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문학 작품이 넘쳐나게 될 때에, 그 안에서 문학적 가치를 견줘보고 마음껏 비평도 해보고 싶다. ‘이걸 소설이라고 썼어?’ 하면서 집어던지고 잘 쓴 소설을 골라 소개하고 싶다.) 


이 작가가 애초에 난민이라는 존재를 자기 소설로 불러와야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일단 난민 문제를 의식하고 난 뒤라면, 난민을 내 세계에 ‘포함해’ 바라보고 사고하는 일이 첫걸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에게 그 세계란 당연히 소설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작가는 기사 한 줄을 보고 ‘뭐? 영종도에 난민들이 들어오고 있어?’ 하며 상상의 날개를 펼쳐 소설을 쓰지는 않았다. 난민은 누구인가 질문했을 것이고, ‘모른다’를 인정했을 것이며, 알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소설가가 단연 잘할 수 있는 바로 그 일, 거대한 힘에 의해 이야기(삶의 맥락)를 제거당한 존재들에게 이야기를 돌려주는 일을 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난민은 누구인가. 나는 이 소설을 읽은 날, 난민인권센터에서 주최하는 <한국 사회와 난민 인권> 연속 강좌 첫 시간에 참석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로 그렇게 학구열이 넘치는 강연에는 처음 가봤다. 나를 포함해 다들 ‘알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난민에 대해 사고하려면 난민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이들의 ‘의지’ 자체에서 이미 배웠다. 그리고 시작된 김현미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강의에서도 큰 감명을 받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지점을 대략 옮겨보면 이렇다. 난민은 국민/비국민의 권력차가 절대적인 한국 사회에서 아예 재현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소수 중의 소수이다. 완전한 타자이고, 완벽한 무권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민이 누구인가’ 묻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절대다수의 우리가 난민을 어떻게 보느냐가 그들의 존재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난민은 누구인가 따져 물을 때, 어떤 기준에 따라 타자가 난민인지 아닌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판별할 때, 이미 난민의 존재는 눈앞에서 녹고 있다. 사라진다. 사라짐당하는 것이다. 난민이 누구인가 묻지 말고, ‘난민성’이 전 지구적 역사 속에서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변화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거기에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게 개입되어 있는지, 개입된 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사유와 행동의 책임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어느 날 난민’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도 ‘어느 날 난민’이 될 수 있다. 지금 국내 일부에서 문화적 야만성과 여성의 안전 위협에 대한 ‘합리적 저항’의 탈을 쓰고 퍼지고 있는 난민 반대는 차별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함을 직시해야 한다. 이 ‘어느 날’ 별안간 찾아온 듯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 유서 깊은 차별을 직시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일단 난민인권센터 월정액 후원을 등록했다. 관련 강좌를 들었다. 관련 책을 찾아서 읽었다. 바탕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내 인식과 사유 속에 난민의 존재를 ‘섞기’ 시작했다.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미 있는 그들의 존재를 지워서는 안 된다. 난민을 반대한다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다만 그건 자기 자신더러 ‘이 세계에서 온전히 사라지라’고 명령하는 일과 같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양선화 "여자, 소설: 한국 여성 작가 장편소설 리뷰"


내 이십 대 전체를 쥐고 흔든 것은 너무나 자명하게도 ‘소설’인데, 더 정확히 말하면 ‘남자가 쓴 소설’이었다. 지금은 어느덧 반대가 되어서, 가장 사랑했던 박민규를 절독했으며 / 전작을 사서 모았던 김도언은 이름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 거침없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천명관의 세계관이 진부하게 느껴진다. 김영하나 김연수 같은 명실상부 지적이고 세련된 중견 작가의 소설을 더 이상 업데이트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안 생기고, 조정래 김훈 황석영 등 할아버지들의 훈화 말씀은 뭐 말할 것도 없다.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나니 여자 소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데, 사실 여자들은 늘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그렇다고 내가 어떤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기점으로 일부러 남소설 여소설을 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냥 어느 날 서점에 가서 쓸어 담아온 책들이 다 여소설인 걸 발견하며 놀라고... 뭐 그런 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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