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 푸른 감정들

청춘(靑春)과 블루(Blue)

by 길바닥 화초

지난 주, 이십대 중후반의 청년들과 함께 교육을 받을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뜨거운 생동감이 반가웠다.


한여름, 후덥지근한 식당에서 유쾌한 40대 남성분을 중심으로 토론이 활발했다. 그분이 문득 농담처럼 말했다.

“여기 어린 친구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연륜이 있는 분들도 계시네요.”

그러며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이십대의 눈들이 ‘그 혹은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뭔가 들통난 듯한 기분이 스쳤다.


돌아오는 길에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냐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를 가지셨더군요. 그게 연륜이 아니면 얻기 어렵죠.”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그런 모습이 자리 잡았던 모양이다.


집에 돌아와 사진첩을 꺼냈다. 스무 살의 나와 지금의 나를 나란히 놓고 본다. 노안은 아니고, 탄력이 조금 덜할 뿐 피부는 여전히 무사하다. 머리카락도 윤기가 흐른다. 그러나 확연히 다른 게 하나 있다. 눈빛. 어쩔수 없이 밖으로 터져나오던 반짝임이, 이제는 내 안을 고요히 비춘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대류하는 맨틀처럼 뜨거웠다.

사소한 일에도 심각했고, 때로는 스스로를 쓸모없다 여겨 절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 나를 밀어붙였다. 관계 속에서는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이 두려워 자주 울었고, 나를 화나게 한 이에게는 옳고 그름을 가리겠다며 날을 세웠다. 그 시절의 나는 너무 뜨거워서, 푸르렀다. 내 안에는 늘 푸른 불꽃이 넘실댔다.


이제 내가 머무는 시공간은 서늘하고 잔잔하다. 때로는 시간조차 멈춘 듯한 적막 속에, 도망갈 곳 없는 다리 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다. 깊고 무거운 심해로 가라앉는 순간도 있다.


영어로 이걸 I feel blue라고 하는 걸까.


얼마 전, 내가 좋아하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했던 한 배우의 인터뷰를 보았다.

“내 청춘이 사라지는구나 싶을 때가 있었어요. 형이랑 통화하며 말했죠. 우울한데 우울증은 아닌 것 같고, 묵직하게 삶의 고민이 들어오고, 쓸쓸하고 뭔가 이상해요.”

그때 선배가 대답했다. “응, 그거 고독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감정에도 이름표가 붙었다. 고독.


이름을 알고 나니, 오히려 궁금해졌다. 고독, 너는 어떻게 생긴거야?

오늘, 용기를 내어 너의 중심부터 들여다본다.


겉으로 보면 혼자 있는 외로움 같지만, 자세히 보면 고독의 바깥을 수많은 이별이 둘러싸고 있다. 젊은 시절, 함께여서 행복했던 사람들과의 작별이 먼저 떠오른다. 이제는 안다. 이별은 어쩔수 없다는 걸. 그 시절의 고마움으로 내 안에 영원히 남는다는 걸. 아무리 슬퍼도 새로운 사람이 찾아올 수 있다는 걸. 빈자리는 또 다른 사람이 채워줄 수도 있다는 걸.


그러나 가장 담담해지기 어려운 건, 세상 따위 무섭지 않던 찬란한 나와의 이별이다. 그것이 내 고독의 핵심 원료다.


아직 고독과 친하게 지내는 법은 잘 모르겠다. 청춘의 유한함 앞에서 초조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일상이 더 선명해진다.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해상도가 높아진 삶은 꽃집에서 산 꽃다발 속 애벌레조차 기특하다. 혼자 먹는 밥이라도 나를 위해 제철 재료를 고르고 정성껏 준비하는 일이 즐겁다.


그렇게 해상도가 높아진 삶은, 걱정을 늘리고 감사도 깊게 만든다. 작은 위기에도 대비하려는 지금의 모습이, 어린 시절 내가 바라보던 어른의 그것과 닮았다. 그때의 어른을 이해하게 된 걸 보면, 더 선명해진 지금이 조금은 좋아진다.


아직 서늘한 고독을 다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과 잘 지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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