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의 적과 흑
스탕달의 책을 읽고 독서토론 모임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쥴리앵을 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나 같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자라,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폴레옹으로 세상이 한 번 뒤집힐 수 있다는 걸 본 후, 성인이 되어 사회에 자리매김해야 할 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쥴리앵이 제일 먼저 사회에 발을 들인 건, 레날 부인 집의 가정교사로서였다. 레날 부인은 투철한 신앙심을 가지고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지만, 남편과의 열애를 느껴보지 못한, 어느 구석에 결핍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야망 있지만 아직 어린, 세상을 몰라 순진한 쥴리앵을 보며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쥴리앵과의 불륜으로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지만 그러면서 죄를 피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용기 있는 여자라고 나는 그녀를 이해했다.
주인공은 거의 신앙심이 없는 사람인데, 당시 사회 밑바닥에서 비굴해지지 않기 위해 사제가 된다. 사제가 되어 자신의 유능함을 발휘하면서 후작의 집에 들어가고 공작과 약혼한 후작의 딸과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때,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이 굉장히 파괴적이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다수의 분들은 이 장면을 이해 못 하셨는데, 내가 뒤틀려서 그런 건지, 나는 이해가 갔다. 내 생각엔 사람은 자유롭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통제의 안정감을 느낀다. 후작의 딸은, 그 어떤 곳에서도 제약 없이 자랐기에, 자신을 통제하거나 휘두르는 사람에게서 안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녀는 그를 위해 이렇게 완벽한 나를 던지는 것에 대한 쾌감을 느꼈으리라.
신분 상승의 욕망과 젊은 욕정을 가슴에 품고 두 여자를 만나러 사다리를 오르는, 심지어 목숨을 걸고 발을 올리는 쥴리앵의 모습은, 사회 밑바닥에서 계층 사다리를 타고자 하는 시도를 비유적으로 나타냈다고 느꼈다. 하지만 시골 농부 아들의 야망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후작의 딸과 결혼하기 직전, 그의 아버지는 더 이상 초라한 농부가 아니라 지방 어느 귀족이 될 수 있던 그 어느 지점에서, 신부의 속삭임에 진실을 털어놓은 레날 부인의 편지로 인해 그는 레날 부인에게 총구를 겨누고 살인죄로 단두대의 이슬이 되어 사라진다.
사형수로 갇혀서야, 그제야 자유로워진 그가 배심원 앞에 서서, 가지고 있었던 사상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을 때, 쥴리앵의 젊음과 패기, 혹은 그의 진정성에 많은 부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틀린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후작의 딸이 아이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여러 장치를 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의 죄는, 나는 너무나도 공감하건대, '감히, 네가 우리와 같아지려고?' 였을 것이다. 사회 상류층의 사람들은 그의 젊음과, 순수함과 그들과 같아지려고 한 그의 노력마저 공감하며, 심지어 마음 아파 기절했을지언정, 우리와 같아지려고 한 그가 용납되진 않는 거다. 감히 네가.
적과 흑, 색깔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적과 흑이 사제와 나폴레옹이든, 열정과 이성이든, 무엇이든 될 순 있지만, 나는 모든 색을 지니고 있는 검은 사회의, 하나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붉은 영혼으로 보였다. 자꾸 소설 파칭코의 노아가 생각났다.
노아는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고, 모든 규칙을 지키며 최고가 되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적대적인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노아가 그런 잔인한 이상에 사로잡히도록 내버려 둔 것이 선자의 실수였다.
쥴리앵은 결국,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엔 영혼이 너무 솔직했다. 그의 야망이 이뤄지진 못했지만 감옥을 탈옥하지도, 상소를 하지도 않은 죽음은, 어쩌면 가장 그 다운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현재 당신답게 살고 있냐고. 나는 나답게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 질문을 타인들에게 돌려주었을 때, 그들도 자신답게 살고 있다고 말했는데, 각각의 근거는 달랐다. 내가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고 있다던가, 내가 선택할 기회가 많았다던가 하던 거다. 어떤 분께선 쥴리앵이 선택할 수없이, 어쩔 수 없이, 사제가 되었고 후작의 집에 갔다고 하셨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그 사회에 있었던 쥴리앵이, 농부의 아들이라는 출생 말고, 상황이 어쩔 수 없어, 마지막 죽음을 맞게 되어 나답게 살지 않았다고 느꼈을까? 아마 그 사회에 살고 있던 쥴리앵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길을 선택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반문하고 싶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하고 있는가. 선택하는 삶을 부여받았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과 책임이 나답게 사는 지점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때 나답게 살고 있다고 말한 것은, ‘나에게 주어졌던 한계 있는 선택지를 인식하고, 그 한계 있는 선택지 중에 나라면 내가 선택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선택을 한 나의 근거를 내가 이해하고 선택했기에 나의 삶을 받아들인다’지, 나에게 선택지가 있었고 내가 선택할 수 있었기에 나답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인류 역사의 관점에서 현대 사회가 과거에 비해 선택지가 많아진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쥴리앵이 살았던 시절에도 사회 상류 계층은 쥴리앵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는 거다. 후작의 딸은 심지어, 공작이 아닌 낮은 계급의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고 오히려, 지금 시대에는 어려울 수도 있는, 가짜 귀족 집안을 만들어 남편의 신분세탁마저 해낸다.
너와 내가 사는 시대의 다름에 대한 이해와 그 시대보다 지금 시대가 더 났다는 그 어떤 착각의 사이.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선택을 부여받았어라는 그 어떤 위치. 나는 왜 거기서, 쥴리앵 시대의 귀족들의 위선이 느껴지는가. 그래서 그게 불편한가보다. 나는 그보다 선택지가 많아서 나답게 살고 있어요 라는 그 문장이 꼭, 쥴리앵을 보던 그 상류층 사람들 같은가 보다.
그래서 어쩌면, 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쥴리앵 같은 이들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쥴리앵을 보면서, 현대 사회에서 선택지를 많이 부여받았는데도 너는 왜 해내지 못하니라는 말의 무관심과 너는 참 안 되었구나. 선택지를 많이 못 부여받았으니, 참 어려운 인생을 살았겠어라고 말하며, 심판장에서는 사형을 내릴 그 구조의 위선에, 불편함에서 더 나아가 역겨움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또 여기서 나에게 묻고 싶다. 대부분이 쥴리앵을 자신과 같다고까지 여기진 않는데 나는 왜 이토록 그를 대변하며, 감정적으로 화가 나는가. 나는 그처럼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처절했던가, 그만큼 열정이 있었나, 그렇지도 않으면서 나는 왜 이토록 화를 내고 있을까.
왜 나는 이토록 나와 쥴리앵을 비슷하다고 여길까. 나의 계층에 대한 처절한 인식일까, 한 사람으로서의 안타까움일까. 나의 결말은, 그처럼 나답게 살지만 결국 검은 사회에 한 일원으로 으스러질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