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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Prison

by 박요한

Dream Prison


잠이 들었다. 아니, 잠이 나를 삼켰다.


나는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손톱을 살짝 꼬집어 보았다. 감각이 없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 아니, 깨어날 수 없다는 것.


내 앞에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끝없는 통로. 푸석하게 갈라진 대리석 벽, 낮고 무거운 천장,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 축축한 공기가 폐 속까지 스며들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부드럽게 꺼졌다. 마치 살아 있는 살점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소리. 신발 바닥이 젖은 바닥을 밟는, 눅눅하고 끈적한 소리.


천천히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낡은 정장, 마치 오랜 시간 안개 속에 갇혀 있던 것처럼 희미한 얼굴. 그는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없었다.


대신, 그의 말이 직접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


숨이 턱 막혔다.


“길을 찾아. 하지만 조심해. 여긴 네가 아는 세상이 아니야.”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먼지가 되어, 안개처럼.


나는 다시 앞으로 걸었다. 복도는, 끝이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이 갈라졌다.


왼쪽에는 거대한 문. 오른쪽에는 어둠이 가득한 숲. 어디에서도 바람이 불지 않았다.


나는 문을 선택했다.


문이 열리자, 안쪽에는 거대한 연회장이 있었다. 검은색 식탁, 촛불이 깜빡이는 샹들리에, 그리고 그 주위에 앉아 있는 존재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이 없는 여자.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보았다고 느꼈다.


부리에 피가 묻은 새 인간. 희미한 깃털 사이로 튀어나온 갈비뼈가 거울처럼 빛났다.


머리가 셋 달린 남자. 세 개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너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나는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 얼굴 없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차가운 손끝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끈적하고 축축한 감촉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내 얼굴이, 녹아내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뜬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그 복도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과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이번에는, 복도 끝에 문이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보았다.


문 너머에는 내가 서 있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문 너머의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절대 깨어날 수 없어.”


문이 닫혔다.


나는 다시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끝없는 꿈의 감옥 속으로.





떨어졌다.


아래로, 더 아래로. 몸이 가벼워졌다. 손끝이 희미해지더니, 서서히 물처럼 녹아내렸다. 나는 그렇게 흐르듯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눈앞에는 호수가 있었다.


물이 이상했다. 마치 유리로 만든 것 같았다. 투명한 수면 아래로 하늘이 비쳐 보였다. 나는 호수 위에 떠 있는 건지, 하늘 위를 걷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쳐 보았다. 맑고 차가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잔잔한 언덕, 낡은 나무 벤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회색 커튼.


어디서 본 걸까. 기억을 더듬는 순간, 문득 떠올랐다.


어릴 때 살던 집.


그 집과 꼭 닮은 공간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도 없었다.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고, 창문도 꼭 닫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미니어처 속 풍경 같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낯설지만, 묘하게 익숙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촉촉한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 누구야?”


그가 빙긋 웃었다.


“넌 나 알았었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응.”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잊었지.”


말이 이상했다. 나는 이 사람을 본 기억이 없었다.


“…언제 봤는데?”


그가 내게 다가왔다.


눈이 깊은 호수 같았다. 들여다보면 그대로 빠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뺨을 가만히 만졌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기억이… 쏟아졌다.


아니, 기억이라기엔 너무 흐릿했다. 감정만 남아 있었다. 애틋한 무언가가 가슴속을 찌르듯 스쳐 갔다.


나는 그를 알았다.


하지만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너 대체 누구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유리 호수가 갈라졌다.




나는 물속으로 떨어졌다.


아니, 기억 속으로 빠졌다.


눈을 뜨니, 어릴 때 살던 집 앞에 서 있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바람이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그리고,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한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탁탁, 연필이 종이를 긋는 소리.


나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뭐 해?”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글 써.”


목소리가 낮고 차분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글?”


그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연필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네 이야기.”


“…내 이야기?”


그가 작게 웃었다.


“응.”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걸, 정말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기분.


“그럼… 넌 누구인데?”


그가 내게 한참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널 기억해.”


“…”


“넌 나를 잊었지만.”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탁자 위의 종이가 흩날렸다. 거기에는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넌 이곳에서 깨어날 수 없어.”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를 다시 바라보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부서졌다.


나는 다시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낡은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벽에는 오래된 얼룩이 퍼져 있었고, 창문들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전기가 끊긴 듯했다. 나는 아파트 입구에 서 있었다. 비는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공기는 싸늘했다.


발밑이 축축했다. 고개를 숙이자, 신발이 온통 젖어 있었다. 빗물 때문이 아니었다.


피였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움찔하며 돌아보았다.


작은 손이었다.


한 아이가 내 옆에 서 있었다.


파란색 운동복 차림의 초등학생.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깊고 검었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너…”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떨렸다.


“너 누구야?”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무표정하게 출렁였다.


어디선가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날 보네.”


나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히 그에게서 나왔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넌 나를 잊었지.”


나는 숨을 삼켰다.


“난… 난 널 모르는—”


“거짓말.”


아이가 잘린 듯 말했다.


짧고, 단단한 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잊고 있던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칙칙한 어둠 속에서, 무겁고 천천한 걸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곧 올 거야.”


“……누가?”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아파트 단지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참았다.


그리고, 기억이 열렸다.




그 밤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밖에서는 가로등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낡은 아파트 단지. 고요한 복도. 아무도 없는 놀이터.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죽였다.


무거운 걸음. 천천히, 그리고 멈칫거리며 다가오는 발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문이 열리면, 끝난다는 것을.


그러나 문은 열렸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나를 보았다.


“거기 있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숨을 곳을 찾았다.


그러나 숨을 곳은 없었다.


손목이 잡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가운 바닥에 넘어졌다. 손바닥에서 피가 났다.


그가 다시 다가왔다.


나는 어깨를 감싸 안고 웅크렸다.


하지만, 그때.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작은 그림자가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그 아이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기억이 찢어졌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나는 낡은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그 아이가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너.”


아이는 천천히 나를 보았다.


나는 목이 콱 막힌 것처럼, 힘겹게 물었다.


“넌… 누구야?”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 아이는 나였다.


그날 밤, 그 복도 끝에서 나를 지켜보던 아이.


잊으려 했던, 아니, 잊어버린 아이.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기억났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넌 아직 여기 있어.”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세계가 부서졌다.


나는 다시 꿈의 감옥 속으로 떨어졌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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