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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7일

세븐데이즈

by 박요한

도시의 새벽은 늘 그렇듯 적막했다. 가로등은 흐릿한 달빛처럼 차가운 빛을 흘렸고, 거리는 온통 정지된 시간 속을 달리는 듯했다. 김현수는 익숙한 습관대로 손을 뻗어 라디오를 껐다. 적막이 차라리 더 편했다.

그러다 멀리, 어깨가 축 처진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차를 세웠다.

“서울역 가죠.”

손님은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코트는 낡았지만 그 안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단단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은 불쑥 말했다.

“기사 양반, 일주일 동안 자네 시간을 좀 빌릴 수 있겠소?”

현수는 룸미러를 통해 노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주름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무슨 뜻이에요?”

“내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소. 암이 말기라오.” 노인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도 없고, 재산도 얼마 안 남았소. 하지만 죽기 전에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주일을 보내고 싶소. 당신이 도와줄 수 있겠소?”

현수는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꼈다. 하지만 당혹스러움은 지울 수 없었다.

“보수는요?”

“500만 원 드리리다.”

현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500만 원이라… 평소라면 농담으로 넘겼을 제안이, 그날은 왠지 무겁게 들렸다.

“거절하기엔 너무 후한 제안이네요.”


낡은 기억을 찾아서

첫째 날, 노인은 말했다.

“어릴 적 자주 가던 한강으로 데려다주시오.”

현수는 낡은 강변의 벤치에 멈췄다. 노인은 천천히 내려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앉았다.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노인은 멈춘 사람처럼 보였다.

“강물은 변함없이 흐르는데, 내 시간은 멈춰버렸네.”

노인의 목소리는 강바람에 실려 가볍게 흩어졌다. 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말이 불현듯 그의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둘째 날, 노인은 경기도의 오래된 동네로 향했다. 낡은 골목길을 걸으며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서 내 첫사랑과 손을 잡고 걷곤 했소.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지.”

노인은 골목 끝에 선 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눈가의 주름에 어린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그분이 어떻게 지내는지 아십니까?” 현수가 물었다.

“재혼해서 잘 산다더군. 그걸로 됐소.” 노인은 조용히 웃었다. “행복하다면 됐지, 뭐.”


웃음과 열망

셋째 날, 노인은 말했다.

“놀이공원에 가보셨소?”

현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저는 혼자 놀이공원에 갈 나이가 아니죠.”

“그럼 오늘은 당신과 나, 둘 다 어린아이가 되는 날이오.”

놀이공원은 떠들썩했다. 현수는 어색한 얼굴로 노인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노인은 다른 아이들처럼 신이 나 있었다. 솜사탕을 입에 문 채 롤러코스터를 타며 껄껄 웃었다.

“죽기 전에 이런 기분을 다시 느낄 줄이야.”

관람차에 올라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노인은 말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런 낭비를 더 많이 하고 싶소.”

현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음 생에는 그러시죠.”

노인은 관람차 너머로 이어지는 어두운 하늘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다음 생은 몰라도, 이번 생은 당신 덕분에 괜찮아질 것 같소.”


넷째 날 밤, 노인은 술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이제는 마셔도 누가 뭐라 하겠소. 어차피 내가 이길 시간이 없으니까.”

술잔을 기울이며 그는 한 모금, 두 모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돈만 좇았소. 가족은 떠났고, 친구도 하나둘 멀어졌지. 근데 웃기는 건, 죽음 앞에선 돈도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았단 말이오.”

현수는 잔을 들며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항상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죽기 전이니까 할 수 있는 말 아닐까요? 저도 돈 때문에

이러고 있는걸요?”

노인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돈보다 당신이 더 소중하오.”


마지막 밤

마지막 날, 노인은 현수를 고급 호텔로 데려갔다.

“여기서 내 첫 결혼식을 올렸소. 오늘은 내 마지막 연회가 될 거요.”

그날 밤, 노인은 와인 한 병과 함께 자신의 인생에 작별을 고했다.

“현수 씨, 이 여행 덕분에 내 삶은 결국 아름다웠소.”


남은 삶

노인이 떠난 후, 현수는 그의 요청으로 남겨진 2천만 원을 암 재단에 기부했다. 그리고 택시를 몰면서도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제 삶이란 길 위의 짧은 순간들로 이루어진 여행임을 알았다.

노인의 마지막 일주일은, 그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되어주었다.

삶은 결국, 서로의 여정을 함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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