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집

붉은천

by 박요한

붉은 천


아버지는 머리에 붉은 천을 매고 다녔다.

‘자유투쟁’이라는 글자가 손으로 거칠게 써 있었고,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그 천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늘 걸었고,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광장의 먼지 냄새, 땀에 젖은 옷자락, 손바닥에 묻은 따뜻한 체온.

그것이 내 첫 기억이었다.

나는 유치원에 가지 않았고,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다.

아버지는 말했다.

“교육은 선동이야. 그들은 네 생각을 빼앗으려 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하는 척 웃었다.

그의 웃음이 내 하루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광장과 집, 둘만의 세계


우리는 매일 아침 광장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피켓을 들었고, 나는 종이컵에 담긴 사과즙을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누군가는 우리를 쳐다봤고, 누군가는 모른 척 지나쳤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방식인 줄 알았다.

엄마는 없었고, 형제도 없었다.

세상은 오직 아버지와 나, 두 사람뿐이었다.


그의 말은 곧 나의 진실이었다.

“사람들은 쉽게 속고, 쉽게 복종하지. 너는 달라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문장은 알 수 없는 말로 채워졌지만, 나는 외웠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틈


열두 살 무렵, 나는 처음으로 ‘학교’라는 공간을 동경했다.

골목길에서 마주친 또래 아이들이 웃으며 학교 얘기를 하는 걸 들었다.

“교실에는 책상이 열 개가 넘게 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밤마다 몰래 책상을 그렸다.

그 위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하얀 칠판, 반짝이는 형광등, 손을 드는 아이들.


그러던 어느 날, 버려진 신문지 한 장이 바람에 휘날렸다.

나는 그것을 주워 들었고, 거기엔 아버지의 이름이 있었다.

‘불법 집회 주도자’

‘교육 방해 혐의’

나는 그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언가 금이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몰래 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었고, 나는 조용히 그 신문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건 내가 만든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배움의 밤


열다섯이 되던 해, 나는 야간중학교에 등록했다.

서류엔 가짜 이름을 썼다.

낮에는 여전히 아버지 곁에 있었고, 해가 지면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집을 나섰다.

교실엔 스무 개의 책상이 있었고, 나는 그 중 하나에 앉아 처음으로 ‘나’라는 감각을 배웠다.

누구의 말도 아닌,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질문과 판단.

나는 글을 썼고, 책을 읽었고, 세상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고 조용한 혁명이었다.

아버지는 눈치채지 못했고, 나는 무사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붕괴


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마주친 건, 책상 위에 펼쳐진 수업자료.

아버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표정은 없었다. 말도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앉았다.

침묵은 벽처럼 우리를 나눴고,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배운다는 게 그렇게 좋더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붉은 머리띠를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 천은 오래되어 헤어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늙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그날 이후,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의 동지가 아니었다.


작은 혁명


나는 이 아이를 구하고 싶었다.

세상이 말하는 ‘정상’이란 이름의 흐름 속에서

작고 약한 이 생명이 휩쓸리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본 세상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 속에 있는 진실은 너무 늦게 도착했고,

길 위에 있었던 고통은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울부짖었고, 살아남았고, 맹세했다.

내 아이만큼은, 그 허위로부터 지켜내리라.


그 애가 내 손을 잡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작은 손, 그 안에 담긴 믿음.

나는 그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나는 가르쳤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사랑이었다. 분명히 사랑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아이는 내 눈을 피했다.

문을 나서며 운동화 끈을 조여매던 그 손,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멀어지던 눈빛.

나는 눈치챘지만, 외면했다.

모른 척했다.

그 아이가 진짜 세상을 알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내가 믿어온 세계가 무너질까 봐.


그 애가 교복을 입고 들어선 밤,

나는 천천히 머리띠를 벗었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방패였다.

나는 패배했고, 아이는 살아남았다.

나는 진실을 강요했고, 그 아이는 자유를 선택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이를 부르지 않았다.

부를 이름이 없었다.

나는 그 애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진짜 영웅이란,

끝내 아이를 떠나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독립 혹은 유기


스무 살이 된 나는 도시의 다른 구역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이름도 바꿨다.

그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기에, 나는 내 이름을 직접 만들었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으며, 나는 그의 문장을 되짚었다.

그 안에는 진심도 있었고, 광기도 있었다.

그는 나를 세상에서 지키려 했고, 결국은 세상에서 고립시켰다.


어느 날, 나는 그를 찾아갔다.

창밖의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창가에 바랜 머리띠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너를 위해 싸운 줄 알았다.

그런데 너는 내가 만든 감옥에서 도망쳤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울지 않았다. 나도 울지 않았다.



문을 열자, 방 안은 햇살에 씻긴 듯 조용했다.

창가엔 얇은 커튼이 바람에 밀려 천천히 흔들리고,

침대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아버지였다.

내 기억 속에 있던, 거침없이 외치던 남자.

거리를 누비던 검은 바지와 낡은 워커.

아이의 손을 움켜쥐던 큰 손.

그의 손은 이제 뼈가 도드라지고, 핏줄이 푸르게 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그의 머리맡에 섰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이 아주 천천히,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늙은 얼굴.

굳게 다물린 입술.

거기엔 더 이상 투쟁도 없고, 확신도 없었다.

다만 시간이 남긴 무게만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아버지,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세계에 있나요?

그곳에서 나는 아직, 당신의 딸인가요?’


그 순간,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아이였다.

멀리 떠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돌아왔구나.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에 걸려버렸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옳았다’는 말.


하지만 나는 그저, 눈으로 말했다.

내가 처음 본 그 아이의 얼굴처럼.

처음 손을 잡아줬을 때처럼.

내 딸. 내 모든 시간.


나는 늙었다.

내 세계는 오래전에 무너졌고,

그 위에 혼자 서 있는 이 아이는 나보다 단단했다.

나는 그게 자랑스럽고, 부끄러웠고,

또… 외로웠다.


내가 만든 벽을,

이 아이는 혼자서 넘었다.

그 벽 너머에서 다시 내게 걸어온 것이다.


나는 손을 들었다.

아주 천천히, 떨리는 손을.

그 손이, 그녀의 손등 위에 닿았다.



그의 손이 내 손등 위에 올려졌다.

작고, 가벼운 무게.

그러나 그 안엔, 나를 눌러왔던 수많은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것은 화해가 아니었고, 용서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하나의 긴 작별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살았고,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어릴 적 내가 붙잡았던 그 손을,

이제는 내가 천천히 놓아주는 것이다.




영웅이라는 거울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

그가 나를 들어 올려주던 그 손길,

거리에서 나를 감싸던 그 팔꿈치의 온기.

그러나 영웅이란 결국, 내가 만든 환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그의 머리띠를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붉은 글씨가 희미하게 지워져가고 있다.

그 안에 담긴 모든 진심과 모순, 사랑과 억압을 나는 매일 다시 읽는다.

그는 일그러졌지만,

결국 나를 만들어낸 유일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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