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위의 하루
여훈은 웃는 법을 알았다.
매일 아침 그가 마시는 물은 약간의 햇빛 냄새가 났고,
그의 등 뒤로 떨어지는 커튼 자락은
세상의 끝을 어루만지듯 부드러웠다.
그는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무언가가 지나가면 그것을 느끼는 사람’이라 여겼다.
기억보다 먼저 반응하는 감각들.
팔을 스친 바람의 속도, 신발 속의 얇은 양말감촉,
간장을 조금만 뿌려야 간이 맞는 두부 조림.
그는 자신이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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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훈은 매일의 일정도 비슷했다.
출근길 버스에서 창밖의 아파트를 바라보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꼭 한 번은 숨이 차오르도록 걸었고,
사무실 책상에 앉기 전 한 모금의 물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가 삼켰다.
그 모든 순간,
그는 아주 조용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고 흐린 행복들이,
이따금 스스로를 데리고 온다고 생각했다.
손가락 끝에 맺히는 감정,
심장도 아닌 폐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언가의 떨림.
그것이 그에겐 초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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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턴가
물맛이 평평해졌다.
어느 날은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또 하루는
눈을 감은 채로 지하철역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아무 일도 아니란 듯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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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그런 날도 있다.
감정은 불규칙하고,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잦은 위로들 속에
자신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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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저녁,
그는 슈퍼마켓에서 딸기를 샀다.
평소라면 고무 밴드로 묶인 붉은 과일들이
바로 그날의 행복이 되었을 것이다.
포장을 풀면 퍼지는 과즙 냄새,
손끝에 묻는 미세한 털의 감촉,
그런 것들이 그의 하루를 구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딸기 상자를 열었을 때
그는 문득,
딸기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냄새가 아무런 감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잠시 멍하니 상자를 바라보다가,
그중 가장 붉은 딸기를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단맛이 있었다.
신맛도 조금.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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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물속에 잠기는 나뭇잎 같았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보았다.
그 천장은 예전과 같았지만,
그의 눈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엔 천장에도 계절이 있었고
균열 속엔 그림자가 살았다.
이제 그것은
그저 무채색의 평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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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있었다.
창밖의 나무가 연초록의 잎을 피워냈고,
거리에는 아이스크림을 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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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그는 오래된 다이어리를 꺼냈다.
예전엔 하루를 정리하며
“오늘 좋았던 일”을 한 가지씩 적곤 했다.
“지하철에서 아기가 웃음”
“바람이 옷 사이로 스며든 느낌”
“초록색 양말”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그 기록은 사라졌다.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니라,
느낌이 기억을 데려오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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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적기 시작했다.
그날은,
그저 딸기 상자를 다시 열어
한 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아주 붉었다. 그건 사실이다.”
또 다음 날엔
“오늘은 창밖에 누군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웃지 않았지만, 들었다.”
그는 자신이 느끼지 못해도
무언가를 쓰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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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때,
아주 가느다란 감각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머리를 감고, 타월로 감쌀 때
“머릿결이 젖은 채로 목덜미를 스쳤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감정이 일어나기 직전의 스침이었다.
여훈은 잠시 멈춰 서서
그 감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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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다리는 데 익숙해진 몸이
어느 날엔가,
어떤 미세한 ‘느낌’을
다시 기억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