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집

이별과 죽음

by 박요한

프롤로그

이안은 한 때 누군가의 이름을 자주 불렀다.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를 불러댔다.

그 이름들은 집 안의 물건들과 섞여갔다.

젓가락 옆에, 식탁 위에, 침대 머리맡에 이름이 놓였다가 사라졌다.

그가 알던 시간은 점점 얇아졌다.

어떤 날에는 이름이 아예 증발해버렸다.

그건 죽음 같았다. 아니, 죽음보다 더 낯선 형태의 소멸이었다.

사라짐의 방식

이별은 여러 방식으로 왔다.

문이 닫히는 방식, 문이 열려 있음에도 마치 문이 닫힌 것처럼 행동하는 방식, 혹은 천천히 존재의 온도가 떨어지는 방식.

서하와의 이별은 소리의 제거였다. 그의 말들이 한 줄씩 지워졌고, 그가 쓰던 말투가 서랍 속으로 들어가면서 더 이상 집 안에서는 울리지 않았다.

윤서와의 관계는 서서히 약속이 말라가는 방식이었다. 만나기로 한 날의 날짜가 적힌 달력의 칸들이 흰 종이로 덮이는 것처럼.

부모와의 거리에는, 어떤 때는 말이 아닌 무심함이 들어왔다. 무심함은 가장 친밀한 형태의 폭력이었다.

이안은 이별을 겪을 때마다 그의 몸에서 무엇이 떨어져 나가는지 기록하려 했다.

첫 번째로 떨어진 것은 말이었다.

두 번째로 떨어진 것은 웃음이었다.

세 번째로 떨어진 것은 손에 닿는 온도였다.

사람들은 죽으면 누군가를 떠나보내지만, 돌아올 수 없는 죽음에는 일정한 무게가 있었다. 무게를 헤아릴 수 있었고, 무덤의 형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별은 무게도 형상도 없이 스며들었다.

바람처럼, 습기처럼, 말소리의 결이 바뀌는 것처럼.

기억의 몸

기억은 몸이었다.

기억은 피부와 같은 것이어서, 문지르면 벗겨지고, 칼로 긁으면 흉터가 남았다.

이안은 옛 연인의 향수가 붙은 옷을 세탁하면서, 향기가 지워질 때마다 자신 안의 일부가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어떤 날에는 서랍 속 편지들이 갑자기 활자를 잃고 흰 종이로 변해버렸다. 그는 그것을 두 손으로 쥐고 울다가, 활자가 돌아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기억이 사라지는 방식은 잔인했다. 기억은 죽음이 준 단단함을 갖지 않았다. 죽음은 적어도 장례의 절차를 남겼다. 이별은 아무 절차도 남기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했던 약속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약속들은 그의 몸에 새겨진 문장들이었는데, 문장들이 지워짐으로써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결별을 장례로 치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례는 마침표를 준다. 인정을 한다. 슬픔을 법적으로, 의례적으로 정리해준다.

하지만 이별은 마침표 대신 쉼표를 남긴다. 혹은 문장 부호 없이 문을 닫아버린다.

그 쉼표에 남은 공백이 더 오래도록 그의 몸을 갉아먹었다.

의례의 빈자리

이안은 장례식장을 한 번 갔다. 친척의 장례식이었다. 흰 천과 향과 사람들의 말이 보였다. 사람들은 울었고, 울음을 통해 무엇인가를 끝냈다.

그날 밤 그는 돌아와서, 서하와의 마지막 밤을 떠올렸다. 서하가 남긴 음성메시지 몇 개. 그 모든 메시지를 그는 확인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이미 확인한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메시지들을 지우는 일이, 장례를 치르는 일과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우는 행위는 어떠한 마침표였다. 그러나 지움 뒤에는 다시 살아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떠나보낼 때, 적어도 한 번은 의식을 갖고 싶어 한다. 장례처럼.

이안은 상상했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날 때, 작은 의식을 치른다면 어떨까. 서로의 손을 잡고 몇 문장만 말한다든가, 서로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쳐본다든가.

그러나 실제로 말해보면 그는 어쩌면 침묵을 택한다. 침묵은 때로는 가장 성실한 의례처럼 느껴진다.

침묵으로 끝내는 사람들은 스스로 장례를 치르는 법을 배운다. 스스로를 매만지고, 스스로를 염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위한 장례이자, 타인을 향한 마지막 차가운 선물이었다.

다른 죽음들

사라짐은 하나의 모양만을 가지지 않는다.

친구가 떠난다는 것은, 때때로 자신이 젊었을 때의 날씨를 잃는 일과 같다.

연인이 떠난다는 것은, 지문 같은 일상들이 지워지는 일과 같다.

가족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은, 자신이 본래 알던 땅이 흔들리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안은 때때로 도시의 골목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얼굴들을 만났다.

가게 진열장 속 초상화 같기도 하고, 버스 정류장의 광고 속 웃음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얼굴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가 잃은, 이제는 타인의 삶 속에 박힌 얼굴들이었다.

그는 그 얼굴들을 보고 울지도 못하고 지나쳤다.

울음은 이미 낭비된 감정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울음은 회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별로 인한 상실은 회복의 전제를 불러오지 않았다.

회복의 전제가 없는 슬픔은, 그저 몸에 남아 굳어질 뿐이다.

재생의 살갗

그러나 모든 소멸의 자리에는 새로운 모형이 들어온다.

이안이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그의 식탁에 와서 물잔을 놓고 가기도 했다.

그 물잔은 오래된 습관을 모양만 흉내 내었지만, 그 행위는 그에게 새로운 파장을 남겼다.

누군가가 말없이 가져다둔 신문, 창문가에 놓인 작은 화초, 엉성한 차림으로 걸어 들어온 옆집 사람의 웃음. 이들 모두가 그의 생체에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균열은 곧 틈이었다. 틈으로 빛이 들어왔다. 빛은 늘 숭고하지 않았다. 때로는 잔혹했고, 때로는 맹목적이었다. 그러나 빛은 확실히 무언가를 변화시켰다.

그는 배웠다.

사람을 잃는 일은 죽음의 방식과 닮았지만, 동시에 재배치의 과정이었다.

무언가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른 무언가가 떨어져 들었다.

이 새로운 무언가는 전의 내용물을 그대로 닮지 않았다. 다른 색, 다른 냄새, 다른 두께를 가졌다.

그러므로 이안은 스스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일부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질문의 형식

한밤중, 그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헤어짐은 죽음인가?”

그 질문은 한 문장이지만, 그가 마음속으로 들여보낸 수많은 작은 질문들이 붙어 있다.

죽음과 이별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를 기억하는 것이 죽음을 부정하는가, 아니면 이미 사라진 것을 오히려 단단히 붙들어 두는가.

사람들이 부르는 위로의 말들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는 진실일까. 시간이 해결한다는 말은, 시간이 지나면 아픔이 완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안은 다른 것을 본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의 가장자리가 닳아 없어지고, 이름이 무의미해지곤 한다. 이는 해결이 아니라 소거다.

해결과 소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해결은 마침표를 준다. 소거는 글자 자체를 없앤다.

그는 또한 생각한다.

아마도 헤어짐은 죽음과 닮았으나, 더 불투명한 죽음이다.

죽음은 눈에 보이는 흔적을 남긴다. 사진, 유품, 무덤.

헤어짐은 흔적을 깔끔하게 치워버리고, 흔적을 대신할 말들을 남긴다. 그 말들은 흔히 무심하다.

그 무심함이 가장 큰 상처다.

에필로그 : 작은 부활

어느 봄날, 창문가에 놓인 작은 화분 한 그루가 새순을 틔웠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화분이었다. 이안은 그 새순을 보며, 자신이 잃은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사라진 것들은 다른 형태로 남아 있다. 기억 속의 흔적, 습관 속의 빈 자리, 언어의 틈.

그것들은 재현되지 않지만, 다른 모양으로 영향을 준다.

사랑했던 얼굴의 각도, 친구와 나누던 말의 리듬, 부모의 무심한 눈빛 이것들은 모두 다른 이름으로 그를 건드린다.

이안은 이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호흡한다.

호흡은 예전과 같으면서도 달라졌다.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는다. 대신, 그가 남긴 공백을 더듬는다.

공백을 더듬는 일이 그에게는 살아 있는 일이다.

그는 알았다. 헤어짐은 죽음과 닮았지만, 결국 그것은 삶의 한 방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죽음처럼 단단한 종결을 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반복적으로, 미세하게, 매일 조금씩.

마지막 문장으로, 이안은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오늘도 조금 더 죽고, 조금 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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