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명동 버스정거장
내가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고 바로잡는 일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2014년부터 작년 말 까지 약 10년 정도 명동역의 버스정거장을 이용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퇴근길 버스에 오르는 일이 너무나 피곤하게 느껴졌다. 지난 9년 동안에도 대체로 사람이 많은 정거장이었지만, 지난 몇 달 사이 급격하게 정거장에 사람으로 미어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입석금지 제도의 여파가 뒤늦게 심해졌나 싶었다가, 나중에는 다수의 기업들이 재택근무 제도를 축소하게 되면서 출퇴근 인구가 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버스정거장에 세워진 번호 푯말이 오히려 버스의 진출입 경로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주말,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명동을 지날 때 즈음이었다. 내가 탄 버스는 A/B/C 중 C푯말에 서야 하는 버스였다. 그런데 우리 버스 뒤로 A, B 버스를 포함한 다른 버스들이 줄지어 있었다. 우리 버스가 C푯말에 정차하게 되면 승하차하는 시간 동안 A, B버스는 푯말 앞까지 진입을 할 수 없다. 게다가 A, B 버스의 승객들은 타야 하는 버스가 이미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C버스의 승객이 모두 승하차할 때까지 불필요한 기다림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기사님은 C푯말에 세우지 않고, 푯말이 없었을 때처럼 가장 앞쪽으로 당겨서 버스를 세우셨다. C푯말 앞에 줄 서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와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버스번호 푯말이 세워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1년 전에는 버스번호 푯말이 없었고, 승차문 앞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이 더러 있었지만, 이렇게 정거장이 발딛기 힘들진 않았던 것 같다.
같은 날 뉴스에서는 명동역 혼잡의 다음 대책으로 예약제가 거론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에서 보고 검색해 보니 이미 2023년 여름부터 시범 운영 중이었던 것 같다. 출퇴근 버스에 좌석 예약제라니, 10년 차 경기-서울 출퇴근러로써 기가 찰 노릇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 노력, 돈을 들이는데 적확한 해결책이 아닌 것 같아 보여서 답답했다.
https://www.yonhapnewstv.co.kr/news/MYH20240106001200641?input=1825m
그러다 며칠 전, 버스 정거장 푯말사업을 유예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과도 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0171
오 시장은 "원래는 앞뒤로 뛰어다니며 버스를 타다 보니 빠르게 탈 수 있었는데 최근 (정류소) 중간중간에 줄 서는 곳이란 기둥을 세우고 버스번호를 썼다"며 "바닥에 쓰여 있던 버스번호를 보기 쉽게 위에다 써놓다 보니 그곳에 줄이 형성되고, 그 줄 앞에만 와서 타다 보니 앞에 버스가 빠지지 않으면 뒤에 버스가 밀리는 그런 버스 열차 현상이 벌어졌다"라고 했다.
예약제를 듣고 꽉 막혔던 속이 그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문제 해결을 위해 점점 더 상황이 꼬이기만 하는 것 같았는데 유예한다니 반가웠다.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더 나은 보완책을 만든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몇 달 동안 명동역에 서서 시달린 고생을 생각하면 그들을 옹호하거나 미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대책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사용자를 이해하지 못한 UX가 이렇게나 무섭다. 그래도 해결을 위해 잘못된 정책을 되돌리는 모습에서 크게 느꼈다. 실패를 인정하고 롤백할 용기는 우리에게도 중요하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