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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부언니 Sep 15. 2019

우리는 거절이 어렵다.

착해서 거절을 못한다고 하셨나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란 제법 상대적이라,

어떤 말이 칼이 되어 날을 세울지는 사실 알기 어렵다.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을 때 상대방이 보이는 반응을 보는 것이 힘들다. 나의 거절로 인해 상대방이 힘들어하면, 내가 나쁜 일이라도 저지른 듯 한 마음에 힘이 들고, 상대가 나의 거절에 발톱을 세우면 그건 그것대로 힘이 든다. 이러한 불편한 마음은 인류애적 문제를 떠나서 나를 지키려는 방어기제로 작용하게 된다.


경험에 빗대어 덧붙이자면, 전자의 경우 야근하는 상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를테면 제사라던지)일 테고 후자의 경우, 호전적인(데다가 감정의 기복까지 다이나믹한) 사장님의 가게에서 쇼핑 중에 살 것처럼 굴다가 지갑을 열지 않고 돌아 나왔을 때 벌어지는 상황과 비슷하다. 분명 나의 의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에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는 일은 이 외에도 많다. 번화가를 걸을 때 좌우에서 날아드는 전단지를 거절하기 어렵다던지, 일찍 일찍 다니라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던지.


혹자는 '착해서 거절을 못한다.'는 말로 우리의 마음을 후비기도 한다. 착해서 거절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거절로 인한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자기 방어가 작용할 뿐이다.


거절의 반작용으로 돌아오는 말 중에 비수가 되어 우리의 가슴에 꽂힐 만한 말이 몇 가지 있다. '네가 그럼 그렇지'하는 사기를 꺾는 말.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일까'하는 설 자리를 빼앗는 말. '가식적이네'라는 진심을 와해하는 말. '그래 넌 원래 그 모양이었어.'라는 뿌리부터 의심하는 말. 사실, 어떠한 말을 할 때 던지는 사람의 의도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듣는 이의 태도이며, 마음가짐이다. 상처되는 말을 듣더라도 용인하거나, 의연하게 받아넘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하는 말에 대한 주도권이 나에게 없기 때문에 나의 마음가짐을 단속하는 쪽이 보다 승산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했다는 잘 알려진 이야기처럼, 정작 치료받아야 할 사람들은 오지 않고, 그런 사람들에게 상처 받은 사람들만 상담받으러 온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가 자주 들리는 것이 좋은 현상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절의 다양한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꽤나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 내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상대에게 시간과 공을 들여서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완곡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분한 설명 없는 거절이 가져오는 반작용이 나를 괴롭힐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거절의 이유에 대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설명하는 것이 결론적으로 나에게 이롭다. 혹은,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직접 해내기는 무리가 있지만 이런 방식을 고려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는 등이다. 후자의 경우, 전자에서 더 나아가 부탁한 이의 고민을 함께하는 최선의 성의를 보인 것이지만 최악의 경우, 내 제안으로 인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의 해결책까지 상대가 나에게 기대할 수도 있다는 점이 함정이다. 제안을 받아들인 결정자, 즉 책임자가 책임소재를 제안자에게 전가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빈번하다. 보라는 달은 보지 못하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뚫어져라 쳐다본 격이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머리를 맞댄다면 이상적인 결과나 나오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서로 간의 관계는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목적은 해결이지 또 다른 문제의 시발(점)이 아니니까.


거절도 연습이 필요하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고 옹알이를 배우듯이, 우리가 처음으로 낯선 나라의 말을 배우며 더듬더듬 의사를 표현하듯이, 거절하는 방법도 익히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학습된 거절의 능력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나를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나의 안위를 위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 내 주변의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힘이 들어 내 주변인들에게 신경질을 내거나 예민하게 구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결국 주변인들을 위해서라도 나의 안위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나를 지키는 건
내 가족을 지키는 일이에요.


관계에 있어서 대립과 조율은 불가피하며, 그 과정에 있어서 동의하고 거절하는 순간 또한 수도 없이 반복된다. 다툼이 없었기 때문에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툼이 없었다는 건, 그만큼 관계의 진전을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내야 할 문제들을 덮어 놓은 채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대립이 없었기 때문에 조율할 필요도 없었다. 다툼이 아주 없는 관계보다는 많이 대립하고 함께 고민하여 서로가 서로의 설 자리를 돌보아주는 관계가 이상적인 것 같다.


착한 사람이 손해본다.는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와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를 상냥하게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키운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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